[구름의 역사] 28. 대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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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종로.

남과 여라는 것이 무엇인가. 결혼.우정.행복 등을 논하며 그 얼마나 많은 고민에 빠져 헤맸던가.

홍태조의 조그만 방에 숨어 보호를 받던 나는 커다란 의문이 순식간에 어이 없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웃었다.

남과 여는 결합하는 것이로구나. 원시 세상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또 영원한 미래까지. 단 한마디 '결합' 이라는 말에 그치는 관계로구나.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깨지고 부서지고 이긴 자와 진 자가 생기지만 결국 남는 건 남자와 여자라는 인간뿐이로구나. 그렇구나!

밖에서 그녀가 돌아왔다."거리엔 인민군 모습도 많지 않고요. 의용군엔 여전히 끌려가고요. 낙동강에서 싸우고 있나봐요. 대구.부산이 마지막 공략지라고도 하고요."

어느 날 그녀는 남대문시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얼음공장이다. 네모난 바위돌만한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기 책임자가 동생뻘 되는 아무개라고 하면서. 당분간 여기 와서 일을 도와주라고 했다. 명색은 교양담당. 강좌랍시고 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모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그쪽 신분증을 받았다. 돈암동 성곽 밑에 형부 집이 있다고 안내한 일이 있다. 근사한 양옥에 들어가니 커피를 내주는 것이 아닌가. 담배도 러키스트라이크를 피우고 있었다. 습성이라 사두었다는 이야기다.

어느 날 결심하고 나는 그녀를 어머니에게 데리고 갔다. 내가 무사히 가 있는 곳이 그녀의 집이라고 하니 그렇게 반가워하실 수가 없었다.

여기하고 인연이다, 저기하고 어울린다, 기회가 있었지만 한번도 응하지 않던 내가 드디어 마음을 정했는가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낙동강에서는 피아 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방송은 광적으로 "미국놈 물러가라"를 외쳤다.

홍이 새 뉴스를 가져왔다. "단파로 들었다는데요. 지금 오키나와(沖繩)에서 방송하고 있는 VUNC가 있대요. 머지않아 서울로 돌아 갈 것이라고 장담한대요."

인민군이 쳐내려온 지 3개월이 돼 가는데 일본을 항복시킨 맥아더 장군도 힘에 부치는가. 2대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그는 패배하고 마는가. 한반도는 결국 적화(赤化)되고 마는가.

나는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다급하게 공습 사이렌이 울리더니 다다다닷 기관포 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산쪽으로 올라갔다. 총알이 나를 노린 것 같다. 옆으로 스쳐갔다. 혼비백산. 아래쪽을 향해 달려가기를 몇 분간. 세상이 다시 조용해졌다.

새벽부터 쾅쾅하는 큰 포탄 소리가 났다. 포탄 소리는 먼 데서 들려왔다. 함포 사격 같다. 9월 15일 새벽부터.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이 서울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얼마 뒤의 일이다.

인민군은 모든 전선에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만세소리도 못 지르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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