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남산34년>3.제갈조조 李厚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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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인에게 이름이 생각나는 정보부장을 대표적으로 2명 고르라고하면 6대 이후락(李厚洛)과 8대 김재규(金載圭)일 것이다.金은 79년 10.26 궁정동사건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다.
좋던 나쁘던 정보부가 비밀기관이라고 한다면,이후락시대는 정보부가 가장 정보부다웠던 시절이었다.국내정치로 보면 남산은 71년4월 대통령선거의 선거사령부였고,71년10월 김성곤(金成坤)등 여권 실세들을 고문한 저승사자였다.또 72년 10월유신의 탄생지대였고,73년8월 DJ(김대중)를 납치한 1급 범죄자였다.대북(對北)관계에서는 이후락부장의 평양밀행과 72년 7.4공동성명을 연출한 안보중추기관이었다.
3~4년의 짧은 기간동안 그렇게 많은 현대사의 고비와 연결된기관은 정보부밖에 없을 것이다.
69년10월 김형욱(金炯旭)이 떠난 정보부는 70년12월까지잠시 「남산골 샌님」이라는 김계원(金桂元)5대부장을 겪었다.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김형욱시절 중정이 곳곳에서 비명과 파열음을 냈다는 사실을 잘 알고 후임으로 무난한 인물 을 앉혔던 것이다.정권의 이익으로 보면 金부장은 실패작이었다.朴대통령은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씨의 40대기수론에 직면해 『애송이들과 싸울 수 없다』며 「유진산(柳珍山)후보」를 선호했으나 정보부는 신민당후보 조종공작을 성공시 키지 못했다.
HR(이후락)의 별명은 「제갈조조(諸葛曹操)」였다.제갈공명과조조를 합쳐놓은 것같다는 얘기다.3선고지를 넘기위해 朴대통령은그가 필요했다.朴대통령은 생전에 주일대사로 가있던 이후락을 다시 부르게 된 비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김대중이 야당후보가 되자 참모들은 하나같이 큰일 났다고 걱정만 하고 있는거야.밤에 잠이 안오더군.그런데 말이야 새벽에 불현듯 일본에 가있는 조조가 생각나는 거야.다음날 조조를 급히불렀더니 조조는 「각하,어차피 호남표는 야당거니 까 일부만 꽉챙기고 영남표를 똘똘 뭉치게 하면 김영삼보다는 김대중이 상대하기 더 쉽습니다」라고 나를 안심시키더군.』 혁명주체도 아닌 이후락은 63년12월부터 69년10월까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권력과 부를 주름잡았고 다시 정보부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한 것이다.『朴대통령 대뇌의 반쪽은 이후락의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통치자와 주파수를 맞 추는데 비상한 재주를 발휘했다.
주일대사 시절에도 그는 대사관근처 이즈미(泉)라는 생선집의 초밥을 비행기편으로 朴대통령에게 공수할 정도였다.
HR는 정보부장이 되자마자 남산지휘부를 종합청사 19층으로 옮겼다.그리곤 선거공작을 지휘했다.정권은 당시 돈으로 6백억~7백억원 정도를 대선에 쏟아부었다.
여당의원,장.차관등 여권 고위인사들에게 가장 살떨리는 사건이71년 10.2항명의원 고문이다.김성곤.길재호(吉在號)등 공화당의원 23명이 정보부에 연행돼 피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고문을 당한 것이다.지금으로 따지면 민자당의 당직자 .의원 수십명이 안기부에 끌려가 매질을 당한 것이니 참으로 전설같은 얘기다.HR는 이 악역을 이를 악물고 해냈다.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金正濂)씨의 증언.
『추석전날인 그날밤 성북동 한정식집에서 李부장과 저녁을 먹고있었지요.朴대통령으로부터 李부장을 찾는 전화가 왔어요.李부장은「알겠습니다」만 연발하더군요.수화기를 놓더니 李부장은 언더락스잔에 양주를 가득 채워 스트레이트로 3잔을 거푸 들이켰어요.나를 보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하는데 그렇게 무서운 李부장 표정을 본 적이 없었어요.』 HR는 80년 봄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혀 시련을 겪은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경기도광주군 도평요(島坪窯)에서 망명객처럼 여생을 보내고 있다.그런 그가 매년 빠뜨리지 않는 세속행사가 있다.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던 7월4일이되면 김치열 (金致烈)前차장.정홍진(鄭洪鎭)前북한국장.이장우前비서실장등 과거의 동지들과 기념식사를 하는 것이다.그만큼 평양밀행과 남북공동성명은 HR가 인생최대의 성취로 기억하고 있는 일이다. 10월유신이란 비밀작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곳은 HR의 정보부다.정보부의 비밀팀은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이헌정쿠데타를 무리없이 정착시키기 위해 앞뒤 정국을 관리했다.유신선포직후 최형우(崔炯佑).조윤형(趙尹衡).김한수(金漢 洙)씨등 야당의원 11명을 고문한 곳도 정보부였다.
HR는 63~73년 朴대통령을 보필하면서 국가운영에 기여한 공도 적지 않다.그러나 그는 공로자보다는 죄인으로 세인에게 기억되고 있다.그가 한국역사에 저지른 가장 큰 죄 둘은 개인적인부정축재와 김대중 납치사건이다.80년에 발표된 축재액 1백94억원의 진위를 떠나 그는 3공부패의 상징이었다.그는 80년3월『떡을 만지는 사람의 손에 떡고물이 묻은 것』이라며 어처구니없는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김대중 납치에 대해 그는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그가 할 수 있는 역사에 대한 사죄와 보상은 진실을 남겨놓는 일일 것이다. 〈金 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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