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과 달리 우린 수학·통계로 승부”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SUNDAY

“야호, 2주간 수익률이 4% 수준이야!”

자동문 너머로 환호성이 들린다. 방 안에 들어가자 6개의 테이블 위에 41개의 컴퓨터 모니터가 한눈에 펼쳐진다. 실시간으로 전 세계 주요 기업의 상장지수, 개별 기업 주가, 각국의 경제지표 등을 볼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각 테이블에는 6대의 트레이딩 서버가 장착돼 있다. 테이블마다 하나의 독립된 회사처럼 거래할 수 있는 경쟁 시스템을 갖춘 최첨단 설계다. 3개의 벽걸이 모니터에는 코스닥 지수의 등락을 나타내는 빨강·파랑 화살표가 연방 깜박인다. 산업은행이나 국민은행의 트레이더들도 부러워한다는 곳. 서울 홍릉에 위치한 KAIST 금융전문대학원의 트레이딩 센터다.

이 첨단 기기들을 운용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KAIST 학생들이다. 올 초 2대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20명의 정예 멤버로 구성된 ‘KAIST 학생투자펀드(KSIF)’다. 펀드 규모는 10억원. 서남표 총장의 지시에 따라 전액 학교 기금에서 출연했다.
학교가 학생들의 투자에 돈을 대는 것은 국내에서 처음이다. 지도교수인 김동석 교수는 이 펀드를 위해 총 7억원의 시설비를 투자받았다. 학생투자펀드는 MBA 학생이 주축이다. 이 중에는 외교통상부에서 자유무역협정(FTA) 업무를 4년간 담당한 김경민(31·여)씨가 포함돼 있다. 여기에 수학과 3학년 최지훈(22)씨부터 수학과 박사 후 과정의 김창호(29)씨도 가세했다.

김 교수는 10억원의 기금을 굴릴 멤버 20명을 투자전략팀과 주식운용1·2팀, 대안투자팀으로 나눴다. 투자전략팀은 전략의 세부 내용을 통해 각 팀에 기금을 할당하고, 주식운용 1팀과 2팀은 주식 투자를, 대안투자팀은 각종 파생상품을 연구하고 투자한다.
지난 두 달 동안은 온전히 투자 전략을 고민했고, 그 전략에 근거해 실제 매수에 들어간 지 2주가 넘었다. 기금 운용은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돈은 잠잘 틈이 없다
이들은 장이 열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실제 펀드매니저처럼 주식 매도와 매수에 매달린다. 화장실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조차 쉽지 않다. 점심 시간에 입에 빵을 물고 있는 것은 다반사다. 학생들은 “개장 시간에는 주식 매수를 하느라, 저녁에는 수업을 따라가면서 이론을 공부하느라 잠잘 시간이 없다”고 호소했다. 투자론, 포트폴리오 이론, 할당 이론 등을 주로 배운다. 하루 3시간을 자면 많이 자는 편이다. 매일 매매일지를 쓰고, 참고가 되는 논문을 포털 사이트의 카페에 올려 공유한다.

네 팀 중 가장 실적이 좋은 팀은 주식운용 2팀이다. 5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유니버설 포트폴리오’라는 투자 이론에 따라 전략을 짰다. 1990년대 초 미국 스탠퍼드대 토머스 커버 교수가 만든 ‘분산투자 비율 조절을 통한 최적 투자조건 이론’이다. 지난 2주간 삼성전자 등 국내 주식에 3억4000만원을 투자해 3.9%(1326만원)의 수익률을 올렸다.

팀장을 맡은 김봉조(31·수학과 박사과정)씨는 “네 명이 2종목씩 모두 8종목을 맡고, 한 명은 리스크를 관리하고 있다”며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연 수익률이 50%를 넘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29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10년간의 영업이익 추이를 분석한뒤, 수치화된 모델을 제시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대안투자팀은 ‘뉴럴 네트워크(neural network)’라는 인공지능을 이용해 20개 종목의 투자 타이밍을 연구한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간은 매주 금요일 열리는 전략회의다. 아니나 다를까 김동석 교수는 주식 2팀에 “3개월 단위는 투자 종목을 재조정하기에 너무 길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루머나 변수가 많은 시장에는 지나치게 방대하게 접근하려 하지 말고, 아이디어를 바로 적용하는 순발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돈을 굴리는 방식은 저평가된 기업을 발굴해 장기 투자하는 워런 버핏 식 가치투자와는 차이가 있다. 수학과 통계적 분석을 사용해 이론을 세우고 투자 전략을 짠다. 일종의 시스템 투자로, 헤지펀드의 투자 방법에 가깝다. 외국의 헤지펀드에는 수학자·물리학자 등 과학자 출신이 많다. 1조원이 넘는 연봉을 받아 유명해진 미국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의 제임스 시몬스도 수학교수 출신이고, DE쇼의 데이비드 쇼 박사도 컴퓨터 공학박사다.

대학에서 이런 실전 교육을 받은 사람이 외국 은행에는 수백 명씩 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금융공학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며 “은행 규모가 작지 않은데, 금융상품을 다루는 전문가는 적다”고 말했다.
 
기금 운용 경험이 자산
학생들의 반응은 좋다. 김경민씨는 “내년 2월부터 자본시장통합법이 발효되고, 산업은행이 민영화되는 등 금융섹터의 전문인력 고용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동양종합금융에서 3년간 일한 경험이 있는 최윤천씨는 “예전에는 MBA과정에서 2년 동안 배우고서도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했는데 여기서는 6개월 만에 알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실제 기업에서도 학생들의 운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한국밸류자산운용은 올해 신입사원 6명 중 5명을 주식투자 동아리 출신으로 뽑았다. 이 회사의 이채원 부사장은 “운용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을 신입사원으로 뽑으면 입사 후 교육비용이 많이 든다. 기업으로서는 투자를 해 본 사람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추세 때문에 최근 많은 대학생이 동아리 차원에서 실전 투자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KAIST의 트레이딩룸과 같은 시설이 있는 대학은 없다.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운용할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6년간 서울대 투자연구회에서 실전 투자를 익힌 뒤 올해 한국밸류자산운용에 입사한 강대권(28·서울대 경제학과)씨는 “매년 한 번씩 기업을 탐방해 가치평가를 하고 실전 투자를 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투자 설계를 하고 큰돈을 굴려 보는 것이 금융 MBA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며 “학교에 다닐 때 이런 과정이 없어 아쉬웠는데 KAIST 학생들이 부럽다”고 말했다.

이원진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