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책 읽어주는 여자" 레몽 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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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30대 초반의 한 엉뚱한 주부가 신문에 구직광고를 낸다.젊은여성.가정방문해 책을 읽어줍니다.
8년전 한 문예지의 별책부록으로 처음 선보였던 이 유쾌한 소설은 「책을 읽다」라는 지적이며 단독적인 행위를 「대신 읽어줍니다」의 저 희한한 생업전선에 내놓는다.그래서 주인공 마리로 하여금 의기양양 고객들 집 벨을 누르게 하는 것이 다.계십니까. 독서의 은밀한 사유와 사색의 즐거움은 이제 심부름센터의 직원처럼 저 생생한 경험의 세계로 출장(出場)을 간다.
호기심에 넘치는 어린 여자아이와 사춘기 소년,중년의 사업가인이혼남,과거의 영화를 망토처럼 두르고 사는 노미망인과 퇴직판사가 그녀의 고객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정치경제비판』『사물들의 교훈』『소돔성 120일』이 그녀의 텍스트다(얼마나 유쾌하고 얼마나 자유로운가.레몽 장의 인물.텍스트의 그 치밀한 배치.세상에 그토록 많은 유희의 도구들중 책으로 펼치는 상상의 확대라니!).
휠체어에 묻혀사는 극도로 예민한 사춘기소년은 기절하기도 하고,중년의 이혼남은 자신이 애정적.성적 사막에 살고 있다고 열렬히 사랑을 호소하고,점입가경,노미망인은 지난날 사회주의의 승리를 회상하며 발코니에 나가 낡은 혁명의 깃발을 흔 들어대고,엄마의 통제에서 벗어난 어린 여자아이는 길거리에 나가 구경에 정신이 팔리며 근엄과 권위로 포장된 노판사는 책을 통해 아무렇지않은듯 근엄한 얼굴로 은밀한 성적희롱을 즐긴다.
마리의 지적열망의 한 표현인 책읽기(관념.사유)는 그 기상천외한 고객들의 엉뚱한 반응(실재.육체)속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지된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 다섯 고객은 현실에서 억압된 감정,좌절된 욕망,사회적 금기에 대한 충동들을 아슬아슬하게 감추고 마리가 읽어주는 텍스트속 문장의 힘과 아름다움과 사유와 상상세계의 젖을 먹는 아이들과도 같다.젖을 먹는 아이들? 저 책 읽어주기의 구술(口述)은그들에게 유모와도 같다.
그와도 같이 우리들 자신,때론 저 사랑스런 유모-책출장업자의가정방문을 받아보고 싶은 존재들이라는 것.
때로 상상의 문을 열고 거리로 뛰어나가고,깃발을 흔들며,사랑을 호소하고 싶다는 것.계십니까? 누군가 나를 방문했다.함께 출장가겠느냐고.나는 끄덕인다.물론! 나는 유쾌한 웃음 속에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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