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월식(月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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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월식(月蝕)’ - 김명수(1945~ )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국 성큼

성큼

남겨놓은 채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이토록 짧은 시가 소설보다 더 두꺼운 생의 경전이 될 수 있다니. 문장을 손으로 짚는 순간 배어 있던 고요에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시. 달 그늘에 잠긴 마을과 이별에 붉게 물든 사나이. 그리고 말이 없는 누님 가슴팍에 남은 멍든 발자국들. 사랑의 깊은 그곳에서 펼쳐지는 인기척들은 고요의 중심에 울음을 풀어놓는다. 사나이도 없고 누님도 사라져버린 시대. 더구나 말로써만이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시대. 성큼성큼 마을을 넘어가는 사내이든, 남겨진 말없는 누님이든, 시 속으로 걸어 들어가 애틋한 사연을 듣고 싶은 밤. 우리들 사랑은 어떠했는지 격한 사랑은 어느 쯤에서 숨을 고르는지 봄꽃 환한 창문을 열고 잠을 깨워도 보자.

<박주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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