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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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1945(12)마음같아서는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다.그러나 그것은 어머니를 만나는 반가움이 아니다.검정 고무신에 날개라도 달고 싶게 급한 마음의 한 쪽에서는,그것보다더 무겁게 물먹은 짚단처럼 가슴에 내려와 처억처억 쌓이는 암담함이 있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들판길을 걸어서,송충이가 파먹고 있는소나무가 앙상한 야산을 넘어섰을 때는 이미 어둠이 길을 가리고있었다.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한낮보다 더 환하게 마을이 마음 속에 떠올라왔을 때,은례의 눈길은 자신의 집 지붕에 가 멎었다.엄마,나 왔어.조금만 기다려요,나 왔으니까.그런 말들이 가슴속에서 사시나무 떨듯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묵묵히 걸었다.집까지는 한달음이었다.춘식이도 말이 없었다.깨어난 명조를 춘식이는 가슴에 안고 토닥이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 왔다.할아버지 하고 인사해야지.다 왔단다.』 친정 마당에 들어설 때는 어둠이 가득했다.개가 먼저 짖어댔다.사랑방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먼저 마당으로 들어서며 춘식이가 고함치듯 말했다.
『훈장님,춘식입니다.누님 모시고 같이 왔습니다.』 천천히 사랑문이 열리면서 치규가 앉은 채 밖을 내다보았다.마루에 명조를내려놓으면서 춘식이는 댓돌 위에 서 있었다.은례가 마루로 올라서며,울먹였다.
『아버지.』 그림자가 움직이듯 치규가 일어섰다.은례가 방안으로 들어섰다.등잔불이 꺼질듯 바람을 맞아 가물거렸다.마주선 딸과 아버지의 눈길이,아무 것도 말하지 마라,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그렇게 아우성치듯 엉켜들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치규가 자리에 앉았다.
은례가 몸을 숙이며 큰절을 올렸다.그러나 갈자리 바닥에 이마를 박듯이 엎드린 채 은례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치규가 말했다.
『그래.잘 왔다.』 은례의 옆에서 명조는 다리를 뻗고 앉아 두 사람을 흘끔거렸다.그런 명조를 내려다보며 춘식이는 두 손을앞으로 모은 채,서 있었다.
『어려운 걸음을 했구나.』 천천히 엎드려 있는 딸의 어깨를 어루만지려는듯 앞으로 나아가던 치규의 손길이 멎었다.턱이 욱신거리는듯이 어금니를 물면서 치규가 말했다.
『들어가 보거라,에미가 많이 널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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