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만주대륙고구려성>8.五女山城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지린(吉林)省 지안(集安)에서 약6시간 비포장 산길을 달려 고구려의 발상지인 랴오닝(遼寧)省 후안렌(桓仁)에 도착했다.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동명왕)이 처음으로 쌓은 성이다.『삼국사기』를 보면 「주몽 일행이 졸본천에 이르러 바라보니땅이 기름지고 산도 험하였다.마침내 도읍으로 정하였는데 우선 비류수(渾江)가에 간단한 집을 짓고 살았다.그후 동명왕4년(서기전 34년) 가을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고 나와있다.
『삼국사기』가 씌어지기 수백년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탄생에 대해 『비류곡의 졸본 서쪽 산위에 성을 짓고 도읍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해발 8백20의 오녀산을 이용해 구축한 오녀산성은 남.서.북 각 방면을 1백에 이르 는 절벽이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자연의 요새다.다만 동쪽은 평지에 이어지는 급경사의 계곡으로 그곳으로만이 출입이 가능한 구조다.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중국에서는 高麗와 高力의 음이 같기 때문에 고려를 고력으로 쓰는 예가 많다)이란 지명으로 불린 이 평지는 70년대 혼강의 지류를 막는 댐공사로 완전히 수몰돼 지금은 후안렌호수 유원지가 되었다.수몰되기전 그곳에는 지명 그대로 7백여基의 고구려 적석총이 조사돼 옛 도읍지임을 증명했다.
한때 중국학계에서는 오녀산성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그곳을 고구려 산성으로 인정하는데 주저하기도 했으나 지난 86년 랴오닝성 번시(本溪)시 당국이 발굴조사를 한 결과 화살촉.
철기.토기등 많은 고구려 유물이 발견돼 의문을 불식시켰다.발굴된 유물은 현재 지난해 개관한 번시시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행락객들이 단체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후안렌호수 선착장에서 배를 빌려 타고 오녀산성을 남쪽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며 바라봤다.
직사각형 형태의 장엄한 성채가 쥘부채가 펴진 것처럼 보이더니 어느 순간 산성은 거대한 알(卵)모양으로 변해 있 었다.시조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던가.수면은 잔잔하나 수심 60에 이른다는 그 아래 고구려인들의 무덤은 제모습을 이미 잃었으리라.
산성 동쪽 과거 고구려인들이 성으로 드나들었을 평지의 모래톱으로 다가서니 놀랍게도 작은 적석총 1基가 남아있었다.망원경으로 오녀산을 관찰하니 산록 중턱을 가로지르는 검은 띠가 어렴풋이 보인다.성벽이다.이진희(李進熙)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오녀산성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오녀산 정상 평지를 산성의 전부라고 알고있는데 이처럼 동쪽 멀리에서 (수몰 후 호수에서 산성을 관찰한 것은 이번 취재가 처음이다) 살펴보면 산성이 동쪽 산허리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오녀산성에는 3개의 문이 있다.서쪽 절벽 위에 있는 문터로 오르는 급경사 언덕에는 산 위 TV송신소가 쓰는 지상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다.그 선로를 따라 진땀을 흘리며 정상에 올라섰다.그 험한 산 위에 남북 1백여,동서 3백여에 달 하는 평지가펼쳐져 있었다.길을 엇비스듬히 질러 남쪽 절벽 전투지휘소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바위에 오르자 후안렌호수의 장관이 한 눈에들어온다.그러나 다만 자연의 장관일뿐 저곳이 고구려의 거대한 적석총군(群)으로 온존됐으면 역사의 장관으로 비쳤을 것이다.
***동벽엔 稚 초기형태 보여 산비탈을 내려가 찾아간 동문터의 남은 성벽(높이 약6.길이 약20)은 무려 2천년의 풍우에시달렸음에도 그 모습이 의연했다.동문터는 옹성의 초기형태인 ㄱ자형으로 만들어져 적군의 진입이 어렵도록 돼있었다.또 동벽의 일부 남은 곳 중 에는 얕은 절벽과 절벽 사이 움푹 들어간 곳에 성벽을 쌓은 형태도 보여 후기의 치(稚)처럼 적을 3면에서협공하였음을 알 수있다.오녀산성 성벽중 가장 길게 남은 것은 동문터를 조금 지나 산중턱에서 남쪽 절벽으로 이어지는 길이 약1백 의 벽.그러나 앞돌이 모두 빠져 보기 흉하다.남문터는 이남쪽벽과 동쪽벽이 맞닿는 곳에 있다.
오녀산성 산꼭대기 평지에는 누가 언제 붙였는지는 모르나 「천지(天池)」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의 작은 샘이 딸린 못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