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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기획] 가난에 갇힌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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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 어둠과 빛의 경계에 서 있는 두 소년. 판잣집 벽에 단열재가 울퉁불퉁 붙어 있어 비좁은 골목이 어두운 동굴처럼 느껴진다. 서울 강남구의 달동네인 ‘구룡마을’ 소년들이 바라보고 있는 건 한장에 200원 하는 플라스틱 딱지.

한 소년이 죽었다. 차가운 도시의 거리에서. 경찰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6세 元○○군. 15일 경남 마산시 S식당 부근에 쓰러져 있었음. 어머니 가출, 아버지는 대장암 말기, 중학교 성적 우수, 생활고에 독극물을 먹고 자살한 것으로 판단됨'.

소년의 아버지는 1990년대 중반 교사직에서 물러나 사업을 시작했다가 외환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극빈층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학업을 이어가던 소년은 최근 "아버지가 2개월 시한부 인생"이란 소식을 듣고 삶의 끈을 스스로 놓아버린 것이다. 국가도, 사회도 이 소년의 분노와 자살을 막지 못했다. 실업난.가정 해체 등의 한파가 몰아치면서 많은 소년.소녀가 가난의 덫에 갇히고 말았다.

출산율이 급격히 낮아지는데도 빈곤 아동이 계속 늘어난다면 인적 자원 면에서 우리의 성장 동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본사 취재팀은 빈곤 아동의 실태와 대처 방안을 관련 기관.단체와 공동으로 집중 모색했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양육시설(고아원)에서 자라고 있는 혜수(가명.12.여), 지난 4년간 이 아이의 남루한 삶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혜수의 어머니는 호텔 시트 세탁업을 하던 아버지와 성격 차이로 다투기를 거듭하다 99년 이혼하고 집을 나가 버렸다. 이혼의 충격으로 하던 일을 그만둔 아버지는 혜수를 데리고 여관 10여곳을 전전하다 결국 자신의 누나 집에 아이를 맡기고 잠적해 버린다. 혜수의 고모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아이를 키우려 했지만 이 또한 남편의 성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지난해 이곳에 아이를 위탁했다.

이곳 사회복지사 金모씨는 "지난해 28명이 들어왔는데 두명을 빼곤 혜수처럼 부모가 카드 빚이나 사업 부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가정이 깨진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본사 취재팀의 의뢰로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가 분석한 결과 2003년 말 현재 우리의 빈곤 아동은 약 100만명으로 추정됐다. 이는 외환위기 이전인 96년의 두배 규모다. 기존의 빈곤 아동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새로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중산층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취재팀이 사단법인 부스러기사랑나눔회와 함께 빈곤지역 공부방 27곳에 다니는 아동 40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40%가량의 부모가 이혼.별거.사별한 해체가정인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이혼이 가계의 경제 사정을 어렵게 하거나, 반대로 신용불량 등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가정 해체로 이어지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빈곤 아동들은 헤어나기 힘든 가난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부모나 친척에 의해 버림받는 아이들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취재팀이 보건통계연보를 분석한 결과 외환위기 직후인 98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5만7000여명이 버림받아 보호시설 등에 들어온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구인회(具仁會)교수는 "빈곤은 아동에게 건강.교육.심리 발달 등 여러 방면에서 나쁜 영향을 준다"면서 "지금 빈곤 아동에게 적절한 사회적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가 나중에 치러야 할 비용은 그 몇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특별취재팀=이규연.김기찬.김정하.손민호.백일현.이경용 기자
사진=안성식.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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