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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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1945(8) 춘식이가 손바닥의 밥풀을 털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다.그저 가는 세월을 생각하자니…별 생각이 다 나서 해본 소리다.』 올해는 노랑나비를 보았다.
흰나비는 상서롭지 못하다 했는데,그래서 혹시 흰나비를 보면 어쩌나 걱정을 하기까지 했는데 그게 다,지상을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랬다.어느 새 남편의 생사를 걱정하는 일에도 굳은 살이 박이듯 익숙해지고 있었다.
『내가 왜 일본사람 싸전에서 등짐 지던 때가 있었지요.아시잖아요.』 알다뿐인가.그곳에 말을 넣어준 것은 은례였다.
『하다상 밑에서 장사 배울 때 얘기냐?』 『장사는 무슨 놈의장사예요.그런 자린고비는 내 어디 꿈에서라도 볼까 무서운데.개나리봇짐을 싸가지고 다니며 말려도 말릴 위인이라구요.그런데 그런 자린고비가 맨날 하는 소리가 뭔지 아세요.소탐대실이라나.공연히 큰거 바라다가 작은 거 마저 잃는다면서,일은 황소처럼 시키는 거예요.내가 그때 왜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아봤지요.』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였겠지.』 『수양산 그늘이 강동 십팔리 간다고,내가 훈장님 생각해서 거기 붙어 있었지,택도 없는 소리예요.하이고,돈이 뭔지.싸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면서.』은례가 명조를 업으면서 일어섰다.이번에는 보퉁이를 춘식이가 들었다. 『도련님 잠들거든 절 주세요.애들은 자면 더 무겁다구요.』 하는 짓이 기특하다 싶은 생각에서 은례가 우스갯소리처럼 물었다. 『넌 어쩌자구 그 나이에 짝 찾을 생각을 않니?』 『어느 년이 열쳤다고 나같은 위인에게 팔자를 맡기겠어요.살아봤으면 하는 여자도 없구요.』 『일가 못 된 게 항렬만 높다는 말은 들었다만,치마 두르고 애만 잘 낳으면 됐지…고르기는.』 『누님도 참 생각을 해 보세요.어디 여자가 남아나기나 하는 세상이에요? 다들 잡아가는 판에….』 은례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눈에 차는 여자라도 있나 하면,어느새 다들 정신대다 뭐다잡아가니.』 『그러게 말이다.왜놈들은 그 죄를 어떻게 갚으려고무서운게 없이 저러나 모르겠다.인륜도 모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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