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채용·홍보까지 모든 게 계열사 책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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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05면

24일 오후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이틀 전 경영쇄신안이 발표된 여파로 뒤숭숭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전략기획실 임직원 100여 명을 각 계열사로 보내기 위한 인사 상담이 이날 시작된 것도 한 요인이다. 6월 말까지 전략기획실을 해체하기로 한 데 따른 후속 조치가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 측은 이건희 회장 대신 대외적으로 그룹을 대표할 이수빈 회장을 보좌하고 그룹 집단지도체제의 구심점이 될 사장단협의회의 실무를 지원할 최소 인원만 남길 계획이다. 잔류 인원은 임원 2~3명을 포함해 10명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소속 임원은 “원대 복귀가 원칙이니 삼성전자로 돌아가야 할 텐데 갈 자리가 마땅하지 않아 고민스럽다”고 털어놨다. 전략기획실 임직원 60%가량이 삼성전자 소속인 탓이다. 제일기획·삼성생명·삼성SDI 등 주요 계열사 소속 인원도 상당수다. 계열사 근무는 안 한 채 애초부터 그룹 일만 해온 일부 임직원은 원대 복귀할 계열사가 사실상 없는 셈이어서 더욱 난감해하는 상황이다.

삼성 어떻게 달라지나

전략기획실은 삼성의 컨트롤 타워로 불렸다. 59개 계열사와 25만 명 임직원이 모인 거대 조직을 이끌어 왔다. 이런 전략기획실이 없어지게 되면 많은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그룹이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까지 나온다.

사라지는 그룹 홍보
삼성은 그동안 그룹 차원에서 브랜드 관리를 해 왔다. 국내에선 삼성전자·삼성SDI·삼성전기 등 계열사별로 회사 이미지 광고를 해도 해외에 나가면 전략기획실 주도로 ‘삼성’ 브랜드 광고만 했다. 그룹 광고는 삼성의 전체 광고 예산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규모가 작은 계열사들은 세계 각국에서 일일이 광고를 하기엔 역부족이지만 그룹 차원에서 줄기차게 해온 ‘삼성’ 브랜드 광고 덕분에 해외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지게 됐다. 전략기획실 홍보 담당자는 “해외 ‘삼성’ 브랜드 홍보 비용은 전략기획실에서 계열사별로 규모를 감안해 각출했다”며 “전략기획실이 없어지면 이런 식으로 해외에서 브랜드 홍보를 하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선 삼성의 그룹 광고가 없어짐에 따라 미디어 업계와 광고업계의 경영에 주름이 생길 전망이다. 삼성 측은 본관 3층에 운영하던 ‘삼성그룹 기자실’도 6월 말 폐쇄하기로 했다.

그룹 홍보 차원에서 진행하던 사회공헌 활동 등도 상당히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삼성사회봉사단은 전략기획실과 무관한 조직이어서 그대로 운영된다.

우려되는 시너지 효과
1990년대 삼성전관(현 삼성SDI)과 삼성전자가 액정화면(LCD) 사업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적이 있다. 당시 삼성전관은 “먼저 사업을 시작했고, 화면장치인 만큼 우리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LCD는 반도체 제조 공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우리가 해야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맞섰다. 결국 그룹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가 삼성전자 손을 들어줌으로써 삼성전자는 세계 최대 LCD 업체로 자리 잡게 됐다.

이처럼 전략기획실은 계열사 간 이해가 상충될 때 거중 조정하는 역할을 해 왔다. 이런 교통정리가 원활하지 않으면 중복 투자 등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앞으로 삼성을 이끌 사장단협의회는 의사결정권이 없는 협의기구여서 이런 문제가 생길 경우 대처 기능이 떨어질 것이란 지적이다. 삼성 경쟁력의 원동력인 ‘스피드 경영’을 살려나가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만 해도 반도체·LCD·정보통신·디지털미디어(DM) 등 4개 부문 총괄 사장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사업부문별로 실적을 따져 성과급도 따로 준다. 이제까지 가전에서 번 돈으로 반도체 투자를 하고, 반도체에서 번 돈으로 LCD 투자를 하는 식으로 사업 확대를 해왔으나 앞으로 이런 협력체제가 원활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이종우 현대차I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계열사 독립 경영체제로 가면 단기 실적에 치중할 수밖에 없어 미래 성장 엔진을 발굴하는 데 소홀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룹 감사도 중단
전략기획실 전략지원팀은 사업이 부진하거나 비리 혐의가 있는 계열사를 대상으로 경영 진단을 해 왔다. 필요에 따라선 그룹 내 인력 지원을 받아 회계·재무·마케팅·관리 등 전 부문에 걸쳐 진단을 하곤 했다. 말이 경영 진단이지, 옛 그룹 감사팀과 같은 역할이었다. 삼성그룹의 경영 진단은 결과에 따라 해당 계열사의 최고경영자가 경질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삼성 출신의 한 재계 인사는 “각 계열사에도 감사팀이 있지만 그룹 감사팀과는 비교가 안 된다”며 “웬만한 수사기관 이상으로 치밀하고 강도 높게 조사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룹의 감사팀은 계열사에 ‘저승사자’로 불릴 정도다.

인사와 인력 채용 방식도 바뀔 전망이다. 삼성은 매년 초 계열사 사장단 인사와 임원 승진 인사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제 계열사별로 각각 이사회를 열어 사장을 포함한 임원 인사를 하게 된다. 각 계열사의 인력 수요를 취합해 그룹 차원에서 모집 공고를 내고 선발하는 것도 계열사별로 해야 한다. 그룹 공채를 할 때는 취업난이 심각해지면 사회 기여 차원에서 필요 인력보다 채용을 늘리기도 했지만 앞으로 이런 모습은 볼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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