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삼성, 아픔을 딛고 세계 최고가 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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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삼성이 예상을 뛰어넘는 쇄신책을 내놓았다. 이건희 회장이 퇴진하고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는 해외 현장에서 백의종군키로 했다. 그룹의 중추인 전략기획실은 해체된다. 4조5000억원 규모의 차명 재산은 실명 전환한 뒤 사회사업에 쓰기로 했다. 이 회장은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안고 가겠다”고 말했다. 삼성의 쇄신안은 그동안 제기된 개혁안을 대부분 수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20조원 이상이 드는 순환출자 해소와 지주회사 설립도 시간을 두고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단 삼성과 이 회장은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렸다.

삼성이 지난 21년간 이 회장의 리더십 아래 크게 도약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경영-비상 경영-글로벌 경영-창조 경영을 통해 삼성의 매출은 10배, 수익은 75배, 시가총액은 140배 늘었다. 이 회장은 선두에 서서 과감한 인재 채용과 글로벌화를 이끌었다. 삼성은 우리 역사상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첫 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물론 빛과 함께 그림자도 있었다. 최근 특검 수사를 통해 차명계좌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났다. 이 회장은 그 책임을 지고 깨끗이 물러나는 쪽을 선택했다.

이제부터 삼성의 행보가 중요하다. 삼성은 뛰어난 리더십을 보인 선장을 잃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과거의 성공 신화와도 결별해야 한다. 앞으로 이 회장의 공백과 전략기획실의 부재가 삼성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삼성은 느슨한 연대와 자율 경영을 통해 앞길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삼성은 “각사의 독자적인 경영 역량이 확보됐다”고 설명하지만, 선뜻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삼성 앞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과거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불투명한 미래가 놓여 있다.

성공한 기업에는 독특한 DNA가 흐른다. 창업 이후 뛰어난 경영자와 조직원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유전 인자다. 2002년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처음 일본 소니를 추월했을 때 이 회장은 칭찬은커녕 이렇게 질타했다. “5년 뒤, 10년 뒤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이런 긴장감과 도전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삼성의 미래는 어둡지 않을 것이다. 옛말에 큰바람이 불어야만 튼튼한 나무와 잡초를 분간할 수 있다고 한다. 시련과 아픔 없이 일류 기업이 된 사례도 없다. 삼성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됐다. 이번 아픔을 딛고 삼성이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발돋움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