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실패와 이혼, 자살 충동 딛고 일어선 김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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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한때 ‘모란각’이라는 북한식 냉면 전문점이 유명세를 떨친 적이 있었다. 서울 삼성동의 본점은 손님으로 늘 북적였고 창업주 김용은 ‘회장님’ 소리를 들으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젊어서부터 음식 솜씨는 알아줬고, 귀순 후 가수와 라디오 DJ, CF 모델로 활동하며 쌓은 인지도가 더해졌으니 그야말로 ‘대박 아이템’이었다. 그의 외식 사업은 말 그대로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무리하게 전국에 수십 개의 체인점을 내다 보니 관리가 효율적으로 되지 않아 대리점마다 음식 맛이 달라지는 등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매출이 점점 떨어지자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다른 사업에 손을 댄 것이 그만 큰 실패로 이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됐다. 투자했던 사업이 줄줄이 부도나면서 손해액만 무려 120억원. 재산을 모두 처분해 빚을 갚아도 부족한 돈이 수억이었다. 방송에서 손 뗀 후 한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더니 그동안 남은 부채를 해결하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단다.

사기꾼으로 몰리며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시절

누구를 속이거나 남의 돈 떼어먹으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업이 잘 되다 보니 늘 성공만 할 것 같다는 착각에 발목을 잡혔다. 하지만 세상은, 특히 자본주의는 순박한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전 이곳에서 돈의 단맛과 쓴맛을 제대로 봤어요. 돈 많이 벌고 잘나갈 때는 굽실대며 따르던 사람들이 ‘김용 망했다’는 소문 퍼지니까 제일 먼저 등 돌리고 사기꾼으로 몰아가더라고요. 아침에 눈만 뜨면 온갖 사람들이 돈 달라고 아우성인데 가진 건 없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어요.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다 보면 욱하는 마음에 뛰어내리고 싶고, 가끔은 지나가는 차에 그냥 확 받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생각해 보면 돈이 많을 때도 자기 욕심만 채우며 살지는 않았다. 탈북자들 상대로 자선 사업을 벌인 돈만 수억 단위였다.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이북에서 왔는데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선뜻 거금을 내줄 만큼 인정도 많았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재기해서 빚도 갚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데 무조건 사기꾼으로 몰아가자 분통이 터졌다. 게다가 힘든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재일교포 출신 아내와의 관계도 악화됐고 점점 갈등이 깊어져 2003년에는 결국 이혼 도장을 찍었다. 1991년 귀순해 10년 넘게 악착같이 일궜던 성과들이 모래성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손 놓고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야 이거 괜히 남쪽으로 내려왔나 싶더라고요.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 어떻게든 살아야죠. 우선 식당 구조 조정하고 식품 공장을 팔았어요. 갖고 있던 부동산이며 재산, 자동차까지 전부 처분해서 돈을 마련했죠. 비싸게 사서 싸게 처분하는 식이었지만 일단 빚을 갚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음식점도 경기도 일산에 한 곳만 남기고 전부 정리했다.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끌어 모았지만 신용카드는 늘 막혀 있었고 밥 먹을 돈이 없어 굶는 것도 예사였다. 직원들 퇴직금이 밀려 노동청에 불려 다니고, 중국 호텔이라도 헐값에 넘기려고 현지로 출장을 떠나려는데 세금이 체납돼 출국 금지를 당해 눈물을 흘리며 발길을 돌린 날도 있었다. 이혼한 전처에게 아들 양육비를 보내야 했지만 당장 먹을 것도 없으니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속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짠돌이 김용이 혼자만 살려고 자린고비처럼 산다”며 손가락질했지만 오해의 시선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아비 노릇도 못하는 놈’이라는 자괴감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굶지 않으려면 그렇게 억척으로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몸이 부서져라 돈을 모아 재기에 성공했다.

“빚에서 탈출하고 나니까 손에 남은 건 딱 잔액 없는 통장 하나였어요.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편하고 맥이 탁 풀리더라고요. 일주일 동안 내내 잠만 자고 일어나서 그때부터 딱 하나 남은 가게 일에 전념했어요. 사장이라고 거들먹대지 않고 직접 면 뽑고 육수 우리면서 밑바닥부터 시작했죠. 돈의 무서움을 알았으니까 이제는 실패하기 싫어요. 요즘은 하루에 세 끼 챙겨 먹고 출근해서 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감사하면서 살아요.”
정신없이 지나간 그 시절은 김용의 삶에 정말 많은 것을 남겼다. 고난을 이겨내며 배운 것도 많고 깨달음도 많이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커다란 상실감도 맛봤다.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가족과의 이별이었다. 특히 세상에 둘도 없는 아들과 헤어지게 된 것은 지금도 견디기 힘든 아픔이다. 이혼 후 아이는 전처가 키우는데 한동안 가끔 얼굴을 봤지만 요즘은 엄마의 반대로 만나지 못한다. 초등학생 아들 얘기를 하며 김용은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결혼도 인생도,
두 번 실패할 수는 없어요

“애 엄마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아서 헤어지게 됐지만 아들은 이곳에 딱 하나밖에 없는 제 핏줄이잖아요. 정말 제 인생의 모두를 걸 만한 녀석이고 그만큼 많이 보고 싶은데 세상일이 제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네요. 얼마 전에는 재혼한 새아버지 따라서 성도 바꿨다고 하더라고요. 당사자들에게는 자연스런 일이지만 제 입장에서는 마음이 참 쓰렸어요(눈물).”
그의 책상에는 아직도 아들 사진이 담긴 액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창 아빠와의 교감이 필요한 열한 살 아들, 아직은 어리지만 그래도 남자라고 점점 의젓해져 갈 꼬맹이는 사진 속에서만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아들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기 위해서 하루하루 의지를 다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혼자 지내는 그를 보며 주위에서는 종종 재혼을 권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는 부모와 형제를 모두 고향에 남겨 두고 홀로 휴전선을 넘어오지 않았던가. 경제적인 어려움에서도 벗어났으니 이제는 새 가정을 꾸리고 다시 행복을 찾아도 좋을 터. 그 역시 남은 인생을 혼자 보낼 마음은 없다. 하지만 40대의 마지막 해를 살고 있는 김용은 “올해가 사업가뿐 아니라 한 명의 남자로서도 아주 중요한 한 해”라고 힘주어 말하며 조심스레 사생활 얘기를 들려줬다. 요즘 가깝게 지내는 여인이 있지만 이미 한 번 결혼 생활에 실패했던 터라 아무래도 조심스럽단다.

“이미 이혼을 한 번 경험했는데 두 번 실패할 수는 없잖아요. 여기서 또 좌절하면 저 그때는 정말 다시 일어서기 힘들 것 같아요. 이르면 올해나 적어도 내년 연말 전에는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쉽게 결정을 내리기가 좀 어렵네요. 그래서 신중하게 만나고 있어요.”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젊을 때는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얼굴에 뭐 하나 묻은 것까지 숨겨 가며 조심스레 만났지만 요즘은 일부러 자신의 못난 모습도 보여주며 서로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는지 따져본단다. 물론 계산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성격은 아니다. 그 역시 여자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갈고닦은 요리 솜씨 뽐내며 멋지게 한 상 차려내는 로맨티스트다. 하지만 굴곡진 삶을 견디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꾸 현실적으로 변하는 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언젠가 통일 되면 만나게 될 북한의 가족들에게도 사랑을 나눠줄 만한 성품을 가졌다면 더욱 바랄 것 없다.

사업 실패와 이혼은 그의 50년 평생에 가장 큰 시련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도약의 발판이 된 것도 사실이다. 곁에 있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존재들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돈은 다시 벌었고 조만간 예쁜 가정을 꾸리게 될 이 남자. 김용은 요즘 한국에서의 2번째 인생에서 재역전을 노릴 꿈에 부풀어 있다. 남들은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만큼의 돈을 허공에 날리고 거액의 빚을 떠안은 채 죽음의 문턱에 섰다. ‘길을 걷다 확 차에 받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시절, 살아서 숨 쉬는 것 자체가 그대로 고통이었다. 하지만 절망이 컸던 만큼 재도약도 드라마틱했다.

취재_이한 기자 사진_조병각(studio l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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