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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대륙고구려성>7.대흑산산성.건안성.쇠보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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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大連大門大開(다롄의 큰 문은 활짝 열렸다).
遼東반도의 남단 국제항 大連市 변두리의 어느 화물운송회사 가건물에 씌어진 이 표어는 경제부흥에 박차를 가하고있는 중국의 오늘을 상징했다.
大連市 金州특구를 감싸고 솟은 대흑산(大黑山)에서 내려다본 항구의 모습은 활기찼다.
대흑산산성은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 혹은 卑奢城)으로 중국의山東반도와 옛 뱃길로 며칠 거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성은 고구려가 遼東의 맹주가 된 이래 바다를 통한隋.唐의 침입을 막는 최전방의 성이었다.
중국의 『자치통감』 기록에 따르면 614년 7월(음력)『隋의來護兒가 비사성에 이르자 고구려 병사가 반격을 가해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씌어있다.
또 같은 책을 보면 『645년 4월 당의 張亮이 수군을 이끌고 비사성을 습격했다.
사방이 절벽이어서 오직 서문쪽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程名振과王大度가 야간 전투를 지휘했다.5월 비사성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같은 기록은 수.당의 승리만을 적고있고 또 실제로 비사성이함락된 것이 사실이지만 전투가 한달여에 걸쳐 계속됐다는데서 고구려군의 치열했던 항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의 경우는 1,2차 고구려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후 遼東반도 연안을 노리는 단기전을 자주 도발했었다.648년 당이발해에 있는 섬인 오호진에서 수군을 발진시켜 성산산성과 비사성을 쳐들어온 것이 대표적 예다.
대흑산산성은 수.당의 침공 때 전면 장기전이 됐든 단기 유격전이 됐든 항상 최전방에서 그들의 침공에 맞서야했던 글자 그대로 격전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대흑산산성은 거대한 돌산인 대흑산의 자연지세를 활용하여 돌로쌓은 둘레 약5㎞의 굴곡이 심한 성이다.대개의 고구려 석성이 정교하게 가공한 화강암을 이용해 쌓은 것과는 달리 이 성에 사용된 돌은 편마암 종류의 돌이다.대흑산을 형성한 돌들이 그렇기때문이다.
현재 대흑산은 大連市의 관광휴양지로 개발돼 있다.
고구려가 퇴장한 뒤 당은 성내에 당왕전(唐王殿)이라는 사찰을세웠는데 오늘의 석고사(石鼓寺)가 바로 당왕전이다.
건안성(建安城)내는 평범한 중국인 마을의 모습으로 변해있다.
부슬비가 내리는 성내에는 양떼를 몰고가는 젊은 목동의 침울한 표정과 하교하는 어린이들의 왁자지껄 천진스런 웃음이 대조적이었다. 그리 높지않은(해발 약3백)5~6개의 산을 둘러싸고 조성된 건안성은 진입로에 「고려성촌」이란 표시석이 없으면 일반인에겐 그냥 분지로 비칠 법했다.
그러나 성벽이 둘러쳐진 산 위로 올라가면 서쪽으로 멀리 발해만을 조망하는 지세나 남.서.북 육로를 관장하는 형세가 이 곳이 천혜의 전략 지점임을 알 수있게 한다.
건안성은 돌로 쌓은 곳도 있으나 대부분 흙으로 쌓았다.성 둘레는 5㎞가 훨씬 넘을 것으로 짐작됐으며 동서의 직경은 약 1.5㎞,남북의 길이는 약 1㎞에 이른다고 한다.
입구에서 보이는 동서 양면의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는데 높이3,너비5 가량이었다.
지금도 성내 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성벽이 굽이치는 산 능선에서도 고구려의 잿빛 또는 붉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성에는 동문이 하나,서문이 2개 설치됐고 서문 사이에는 배수문(排水門)이 있으며 또한 5곳의 수원(水源)이 있었다 고 한다.모두가 성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기록으로,현재 성안에는 산에서 흘러드는 물을 가두고 방류를 조절하는 작은 저수보가 설치돼 있다. 唐은 遼東을 차지한 뒤 건안성을 건안주로 고치고 州의 도독부치소(都督府治所)를 이곳에 세웠다.
건안성에서도 치열하게 여러 전투가 벌어졌지만 다른 고구려의 성들과 마찬가지로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다만 『자치통감』을 보면 당태종의 1차 침입때인 645년 7월 『張亮의 군대가 건안성 아래를 지나 진을 쳤다.병사들 대부분이 나무를 하러 간 사이 갑자기 고구려 군사가 나타났다.군중(軍中)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겁이 많은 張亮은 의자에 쭈그리고앉아 바라 볼 뿐 말을 하지 못했다.격전 끝에 고구려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도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많은 아쉬움을 더할 뿐이다.오직 성으로 들어가는 곳의 마을이름이 고려성촌이라는것이 그 옛날 고구려의 흔적으로 남는다.
쇠보습은 쟁기에 달아 땅을 가는 농경구다.사진의 고구려 쇠보습은 중국 吉林省 集安의 태왕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위 폭이 40㎝나 되고 날의 반대쪽에는 나무를 끼우는 주머니가 있는 대형쇠보습이다.이같은 고구려의 대형 쇠보습은 중국 遼 寧省 撫順 新城과 평양시 상원군 일대의 적석총에서도 출토된 예가 있다.
이러한 크기의 쇠보습은 사람이 끌 수는 없고 소에다 멍에를 메워 쟁기에 걸어 쓰던 것으로 우경(牛耕)이 행해졌던 증거다.
우경은 당시 고구려의 생산력이 크게 발전했음을 뜻하는 농업 기술상의 진보로 고구려 중기의 발전상을 엿보게한다.
〈吉林省박물관 소장〉 글:李憲益기자 사진:金璟彬기자 도움말:李進熙씨 (일본和光大교수.고고학) 林走煥씨(경희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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