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49. 완벽한 파트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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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TV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한 필자와 길옥윤씨.

결혼을 결심했을 때 나는 스물아홉 살, 길옥윤 선생은 마흔 살이었다. 지금이야 서른을 훌쩍 넘기고도 결혼보다 커리어를 쌓거나 자기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더 열중하는 여성도 많지만 그때만해도 우리 둘 다 상당한 노처녀·노총각이었다.

결혼은 반드시 한국 사람과 해야겠다고 이미 마음을 바꿨고, 나이도 제법 차서 혼인에 대한 얘기를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터라 길 선생과의 결혼을 생각하는 것은 그리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더욱이 음악인으로서 길 선생을 상당히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남편으로서 존경할 수 있으리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길 선생은 분명히 훌륭한 음악인이었다. 지금의 서울대 치과대 전신인 경성치과전문대학 출신인 길 선생은 평양고보 시절부터 음악에 심취했고, 경성치전 재학 때에는 재즈에 매료돼 황금댄스홀 등에서 색소폰 연주를 했다고 한다.

경성치전 졸업 후 음대에 편입하려다 의사였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치대로 편입했지만 결국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재즈를 공부하고자 20대 초반 나이에 일본으로 밀입국했다. 당시 길 선생은 일본의 유명 작곡가인 오자와 선생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됐다. 요시야 준(吉屋潤)이라는 예명도 오자와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길 선생은 일본에서도 금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쿨 캣츠’라는 밴드를 결성해 유명 재즈 연주자로 자리잡아갔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음악성이 뛰어난 연주자이자 작곡가다. 음악적인 면에서 나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진 그였지만, 음악에 대한 내 의견과 생각도 충분히 존중해주었다. 여자라고 무시하거나 나이가 어리다고 쉽게 보지도 않았다. 열한 살이나 아래인데도 좀처럼 말을 놓지 않을 정도로 나를 자신과 대등한 입장에서 존중하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유교적 사상에 얽매어 있던 당시 대부분 남성과는 달리 상당히 열린 마음을 가진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오랜 세월 외국 생활을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국제결혼은 완전히 단념했지만 그렇다고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에 여전히 얽매여 그저 조용히 집안에서 살림 잘하는 게 여성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와 결혼할 마음은 없었다.

결혼이 내 가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으며, 결혼 후에도 한 남자의 아내이자 내 아이들의 엄마로서, 동시에 가수로서 살아갈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길 선생과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파트너였다.

그는 가수 패티 김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의 음악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는 것 역시 중요한 내조라고 나는 믿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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