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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자유를 외친 희랍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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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07면

희망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해선 안 된다. 자칫 희망이란 말을 떠올리는 순간 존재의 층위가 정리되기 때문이다. 때론 희망을 말하는 순간 스스로 인내를 요구하게 될 것이며,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올 것이란’ 희망은 쉬 타협하고 용인하고 타락하게 만든다. 희망은 본디 ‘을’의 것이다. ‘갑’에게 희망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미 삶이 도전이고 극복이요 승리인데….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는 이 가여운 조건들은 ‘을’의 것이다. 희망 말고는 더 붙잡을 것이 없는 변방 국가의 의지들은 ‘을’의 것이다.

한국어판 전집 나온 그리스 문학의 대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러니 아무리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 희망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이 더럽고 치사한 처지를 저주하고 폭로해라. 왜냐하면 희망은 이미 팩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젠 희망을 갖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계를 어떻게 무엇으로 인식하느냐는 건 이미 중요한 일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 세계를 바라보는 내가 어디에 살고 있으며 언제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팩트가 아니라 팩트를 바라보는 공간과 시간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어디에 사느냐, 우리가 언제 이것을 알게 되었느냐가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팩트가 변하느냐고? 순진하기는…. 당연히 팩트도 변화·왜곡될 것이며 진실은 흘러간다. 언제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진실은 바뀌는 것이다. ‘변방 국가의 희망이 가진 역설’이다.

20여 년 만에 다시 카잔차키스를 읽으면서 곤혹스러웠던 것은 ‘그리스인 조르바’로 상징되는 저 자유에 대한 도저한 설파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자유를 말하는 카잔차키스의 변방 국가적 정체성이 새삼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불편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마 우리의 자유 또한 딱 이런 식으로밖에 말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 때문에 거의 동질감이랄 수 있는 안쓰러움이 스스로에게 일었다. ‘20년 뒤의 조르바’를 읽으면서 내가 안쓰러워지다니.

『희랍인 조르바』는 1974년 처음 한국에 번역·출판되었다는데, 내가 처음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는 80년대 중반에 나온 이윤기 번역본이었다. ‘20년 전 조르바’는 나에게 담백했다. 매일 거리를 메우는 시위대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행동할 것인가 말 것인가란 참으로 단순한 문제를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조르바는 우리에게 ‘자유’란 이름으로든, ‘본성’이란 이름으로든 하나의 귀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하. 조르바처럼…. ‘도자기를 빚는 데 손가락이 거치적거린다고 도끼로 손가락을 잘라버린 조르바처럼…’. 도저히 조국에서 버티지 못해 외국으로 떠나기로 했던 한 친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조르바의 삶을 열거하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이 20년 전 내가 읽은 카잔차키스다.

20년 후인 지금은 ‘그리스인 조르바’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보인다. 20년 전 우리를 열광케 했던 저 자유인, 본성의 외침에 따라 한 치의 표리부동함도 없이 존재 그 자체로 자유인인 호방한 캐릭터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변방 국가의 지식인으로서 조르바를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저 ‘을의 지식’을 가진 카잔차키스란 이율배반의 구도가 먼저 보인다.

알려진 대로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당시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크레타 섬에서 자란 카잔차키스는 이른바 서양의 변방인 터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이중의 변방 지역에서 살았다. 터키를 극복하기 위해 보다 우월한 서구문명의 의식구조를 가져와야 했지만, 그 또한 스스로 변방의식으로 몰아넣는 이중의 덫이 지금 읽히는 이유는 뭘까. 그 이중의 덫이 딱 우리 모습인 것처럼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인 ‘나’는 전형적인 서구 지식인이다. 카잔차키스의 화신인 듯한 이 인물은 서구문명의 눈으로 크레타의 자유, 조르바의 정체성을 정리한다. 한편으로 보면 대책 없이 본성에 충실한, 자연산 그 자체라 할 정도로 농탕스럽고 거칠 것 없는 사나이를 형상화하면서 카잔차키스는 이미 문명의 입장에서 만들어낸 자유란 개념을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다.

아무튼 조르바의 자유를 놓고 희망까지 말할 것은 없지만, 20년 전 우리는 혹시 이런 삶이 ‘나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음 직하다. 지금은? 희망조차 그 음흉한 이중구조를 드러내고 있는 지금은 조르바조차 이른바 ‘자유의 오리엔탈리즘’ 정도로 읽히는 것은 단지 세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 사이 지나치게 왜곡된 것일까. 아니면 세파에 모든 것을 빼뚜로 볼 정도로 까칠해졌을까. 살아남기 위해 이면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잔머리만 키운 것일까. 그 20년 사이에 ‘그리스인 카잔차키스’는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되었다. 2007년이 서거 50주년이다. 그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해 우리는 이제 30권에 이르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열린책들)을 갖게 됐다. 9년 동안 작업 끝에 희곡 몇 편을 제외하고 카잔차키스 문학 전체를 망라한 방대한 저작이 출간됐다. 이미 출간됐던 이윤기·안정효 번역본 6종 외 15종을 새로 번역했다. 원서 대조와 교정교열에만 5년이 걸렸단다.

전집 중 『모레아 기행』이란 아름다운 에세이에서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조국, 그리스를 그리스인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다. 그에게 그리스 풍광은 다음과 같은 압도적인 말로 요약된다. 모레아란 코린토스 지협 이남의 그리스 반도를 부르는 이름이다.
“햇빛은 저 휘황찬란한 술 깬 디오니소스다. 그는 온몸이 찢어져 극심한 고통을 당하지만 결국은 그 찢어진 신체를 온전히 결합시켜 최종적인 승자가 된다. 이처럼 그리스의 모든 풍경은 디오니소스가 일대 연기를 펼치는 하나의 터전이다.”

변방의 조국은 아프고 안쓰럽고 안타깝다. 그래서 비극이 된 것이 아니라 변방 국가야말로 왜곡된 억압구조 속에서 스스로 옥죄는 틀을 비집고 간신히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탁월한 서평가랄 수 있는 콜린 윌슨의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란 말은 틀렸다. 카잔차키스야말로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자유를 말할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자유, 그런 공간에서 토해내는 자유란 말이 바로 지금 우리의 처지에 겹쳐온다. 아, 안쓰런 ‘나’여….


“나는 자유다”로 일관한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1883~1957)는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라 불리는 현대 그리스 문학의 대표 작가다. 우리나라에는 마이클 카코야니스 감독의 1964년 영화 ‘희랍인 조르바’의 원작자이자 영화 속 조연 인물의 초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터키의 지배 아래 있던 크레타에서 태어난 그는 아랍계 아버지의 불같은 에너지와 그리스계 어머니의 흙 같은 내향성을 조화시킨 일생을 보내며 자유를 향한 투쟁을 일생 견지했다. “내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든 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다”며 크레타인의 해방 투쟁을 회고하는 그는 글쓰기로 그리스의 영웅을 빚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희곡 ‘붓다’,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수난』『미할리스 대장』『최후의 유혹』, 여행기『모레아 기행』『러시아 기행』, 자서전 『영혼의 자서전』 등이 있다. 사회주의 중국을 다녀온 뒤 지병에 독감이 겹쳐 급작스레 숨을 거둔 그는 생전에 써둔 묘비명 아래 묻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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