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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파 셰프 셋 ‘동해의 맛’에 빠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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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자세한 내용은‘프라이데이 콤마’ 5월호 참조

해외파 요리사 세 명이 동해안으로 향했다. 제철 해산물을 찾기 위해서다. 주문진에서 포항까지 모조리 뒤져 그들이 발견한 ‘동해안의 제철 식재료 베스트 5’를 소개한다.

‘한국 토속의 식재료를 찾아라.’ 해외파 요리사 세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헬스키친’으로 유명한 런던 고든램지 레스토랑에서 수석 셰프까지 거친 레오 강,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김상민, 그리고 캐나다 교포 출신의 스페인 요리 전문인 레이먼 킴이 그 주인공. 한국의 토속적인 재료와 맛을 찾아 서양인들의 입맛에 맞게 ‘메이크 오버(변형)’하기 위해 이들이 뭉쳤다.

“아무리 우리의 맛이 좋다고 말해 봤자 외국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거예요.” 10년 동안 런던에서 요리사로 활약한 레오 강의 말이다. 우리의 음식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대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입맛을 인정해 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식재료를 찾아내고 그것으로 맛을 재조합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다. 합심한 세 명의 요리사는 매달 한 차례씩 전국 각지를 돌며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제철 식재료를 찾아 떠난다. 이른바 ‘미식 기행’ 프로젝트다.

이들은 이미 두 차례의 ‘미식 기행’에서 장흥·벌교·여수·사천·통영을 찾았다. 장흥에서는 일본으로 전량 수출하는 매머드급 키조개를 이용해 요리를 만들었고, 벌교에서는 소문난 꼬막정식 집을 찾아가 한국식 참꼬막 요리를 배워 서양요리에 응용하기도 했다. 여수에서 발견한 노랑가오리와 스캄피(쏙)도 좋은 서양요리 재료. 통영에서는 요즘 한창 제철을 맞은 도다리와 아나고, 볼락과 방풍잎, 생멸치 등을 서양요리에 응용했다.

세 명의 요리사는 국내 여행의 경험이 거의 없다. 그들은 마치 외국인처럼 외국인의 시각으로 전국을 여행하며 식재료를 ‘탐험’한다. 우리에게는 눈에 익은 것도 그들에게는 새롭고 신기한 식재료다. 이번에는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식재료를 찾아 나섰다. 

글=전우치<프라이데이 콤마 에디터> 사진=박정우

1. 주문진항-골뱅이

위부터 보리새우, 청어, 대게.

주문진항의 경매장은 썰렁했다. 간혹 보이는 가자미류와 자잘한 아귀 몇 마리, 그리고 고작 피문어 몇 바구니가 보일 뿐이었다. 경매장의 분위기만큼 우리의 표정도 어둡다. 근처에서 피문어를 파는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지금이 워낙 물고기가 없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수가 줄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4월은 동해안 남쪽에서부터 각종 물고기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시기다. 하지만 매년 남쪽에서 올라와야 할 물고기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이곳 사정이다.

물고기와 상관없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품목도 있다. 동해안산 골뱅이다. 백고둥이라고 불리는 이 골뱅이는 우리가 흔히 호프집에서 먹는 동남아산 수입 골뱅이와는 완전히 다른 맛과 모양이다. 향미가 좋은 프리미엄급 골뱅이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동해안산 골뱅이를 삶으면 육질이 쫄깃할 뿐 아니라 육즙도 그대로 머금고 있어 훌륭한 안줏거리가 된다. 산 놈을 삶아야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4월이 끝물이다. 서둘러야 맛볼 수 있는 제철 해산물이다. <김상민>

2. 묵호항-도다리, 보리새우

묵호항의 어판장은 왠지 모르게 정겹고 믿음이 가는 곳이다. 수협을 통해 경매가 이루어지는 이곳은 고급 어류보다 잡고기가 많다. 하지만 근해에서 잡아들인 국내산만 거래된다. 새벽녘 묵호항에 들어오는 배들이 생선을 쏟아낸다. 수협의 철저한 관리 덕에 양식산·외국산 등으로 속여 팔 수 없다. 묵호항 어시장은 정남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활어가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마음에 드는 활어를 골라 어판장 한쪽에 있는 ‘칼판 할머니’들에게 간다. 칼판 할머니들은 저마다 번호가 있다. 물고기의 양에 따라 2000~3000원을 주면 날렵한 솜씨로 회를 떠준다.

묵호항은 요즘 남해의 주 어종인 도다리와 가자미류가 주력 어종으로 떠올랐다. 남해와 달리 동해안에서 잡히는 가자미류는 물이 차고 수심이 깊은 곳에서 자라 육질이 더 탄력 있다는 것이 현지인들의 주장이다. 상인들은 그중에서도 등에 오돌토돌한 돌기가 솟은 돌가자미를 최고로 친다. 건져 보니 다른 가자미류에 비해 살집이 두툼하게 잡힌다.

보리새우도 눈이 많이 가는 재료다. 새우잡이 전문 어선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량으로 잡히지는 않지만 꾸준한 물량이 있다고 한다. 껍질을 벗겨 날것으로 씹어먹어 보았다. 씹을수록 단맛이 배어 나와 입 안을 향기롭게 하는데, 일식에서 자주 사용하는 아마애비(꽃새우)보다 더 감칠맛이 돈다. <레오 강>

3. 임원항-청어

1980년대 임원항의 명성은 대단했다. 7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바닷가 쪽으로 길게 늘어선 항이 보이는데, 회 센터가 마치 열차처럼 보인다 하여 ‘바다 위의 열차’라고 불렸다. 이제는 속초와 강릉 일대에 들어선 대형 회 센터에 밀리고 있지만 상인 아주머니들의 눈빛에는 아직도 자부심이 가득하다. 자연산 회를 취급하는 수도권 상인들 사이에서 이곳은 여전히 매력적인 항구다. 주문진항이나 묵호항보다 이곳을 한 수 더 쳐주는 것도 사실이다. 살집이 실한 동해산 어류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청어가 한창이다. 수소문 끝에 청어잡이 배를 탈 수 있었다. 오전 3시30분에 시작한 조업은 7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청어는 성질이 급해 바닷가를 벗어나면 금방 죽는다. 활어로 먹으려면 현지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서양식으로 조리한다면 선어도 상관없다. 살집은 등 푸른 생선인 고등어나 꽁치와 비슷하다. 등쪽에 기름기를 머금고 있어 조리법에 따라 감칠맛을 풍성하게 끌어올릴 수 있다. <레오 강>

4. 영덕-대게, 홍게

대게의 막바지 철, 강구항은 그 맛을 기억하기 위한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식당 수족관에서 대게를 사 먹을 수도 있지만 진짜 맛나게 먹으려면 어시장을 활용하는 게 좋다. 관광객이 상급의 영덕 대게를 골라 보겠다는 욕심은 말 그대로 욕심일 뿐이다. 숙련된 대게 상인만이 등급을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아는 척했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마음을 비우고 맘씨 좋아 보이는 상인을 찾아 “솔직히 잘 모르겠으니 좋은 놈으로 골라 달라”고 하는 편이 낫다. 어시장에서는 등급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물량이 많을 때는 5만원에 5~6마리짜리를 구입하면 중급 이상의 대게를 먹을 수 있다. 어중간한 대게를 먹느니 차라리 상급의 홍게를 먹는 것도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게를 찾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급 홍게를 구하기는 수월하다. 어시장에서 산 대게는 상인들과 거래하는 대게 집으로 가지고 가면 5000원에 몽땅 쪄준다. 남은 게 내장에 밥을 볶아 먹으면 배꼽이 찢어질 정도로 배가 불러온다. <레이먼 킴>

5. 포항-참문어

포항 죽도시장은 재래적인 형태의 어시장 중 규모가 큰 편이다. 거래되는 어종도 다양하고 아직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시장 풍경도 정겹다. 대부분의 사람은 포항에 먹을 것이 ‘물회’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는 편견이다. 포항은 동해안 어시장을 통틀어 씨알이 가장 굵은 어류들이 모이는 곳이다. 동해안의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곰치(물곰)와 장치도 죽도시장에서 파는 것이 가장 크다. 고래고기·상어고기·개복치 등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어류도 많다.

하지만 죽도시장의 베스트 식재료는 참문어다. 예닐곱 살짜리 어린아이 키는 족히 될 만한 커다란 참문어들이 시장 여기저기서 거래되고 있다. 올해는 참문어가 대풍년이 들어 거래량이 부쩍 늘었다. 문어는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별미 식재료다. 서양인 중에는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최고’로 치는 이들도 많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처럼 문어잡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원하는 크기의 참문어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은 요리사로서 엄청난 행운이다. <김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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