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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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제2장 불타는 땅 운명의 발소리(18) 그도 아마 흔히 친일파라 불리는 집 자손이었겠지.미치코의 말을 들으며 그때 지상은혼자 쓴웃음을 지었었다.
조선에 남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친일이라는 말과 인연이 없이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이 누구일까.그런 생각을 했을 때 지상은 미치코의 오빠가 가졌다는 그 의문에 차마 대답해 줄 말을찾지 못했었다.
남의 땅이 되어 버린 게 언제인가.내선일체만이 조선의 살길이라고 한 게 또 언제인가.조선 청년에게 있어 일군으로 징용되는것은 황국신민의 일원이 되어 대일본을 위해 전쟁에 나가 목숨을바칠 수 있는 길이 열린 영광이요,성은이 아니 었던가.조선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는 것이 없었다는 그 청년,미치코의 오빠가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그 청년의 마음에 무엇이 서려 있었는지는 모른다. 둘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빼앗긴 나라,잃어버린 민족혼.그런 것이 그에게 남아 있을 까닭이 없었을 수도 있으리라.
일본인으로서 출세를 해 스스로의 영달을 꾀하고 가문을 빛내는 것이 총명했다는 청년의 뜻이었을 수도 있다.아니면 그보다 더하게,진실로 조선의 모든 것이 부끄럽도록 열등한 것이어서 입에 올리기조차 싫었을 수도 있다.
아니,실로 조선에서 태어나 그 땅에서 자라면서 자신의 몸에 조선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조차 씻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 또래가 어디 하나 둘이던가.그들은 눈썹 하나,숨소리하나까지도 일본인과 똑같아지기를 얼마나 갈망했던 가.그들과 같아지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속을 흐르는 피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무엇이라도 씻어내고 싶어했었다.
어찌 그들의 숫자가 하나 둘이며,몇몇이었더란 말인가.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이 그렇게 되기를열망했고 그렇게 될 수 없는 자신을 차라리 부끄러워했었다.
돌아서서 친일파라고 손가락질을 하고,자신들끼리 모여서 친일파라고 수군거리는 것들이,그 모든 짓거리들이 결국은 이불 속의 활갯짓이요,결국은 저 못난 탓을 그렇게 돌리며 가슴이라도 쓸어내리는 짓이라는 걸 그들이 먼저 알고 있지 않았던 가.그것이 조선사람이 말하는 그 친일파라는 게 아니었던가.
『왜 묻는 말에 대답이 없어?』 옆에서 걷고 있던 길남이 모자를 벗어 머리를 쓰다듬어 넘기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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