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광복50돌-戰後50년 日언론 對韓논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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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패전후 일본인들의 한반도에 대한 「감정적 거리」는 일본 언론의논조에 그대로 반영돼왔다.패전직후 일본 지식인들의 주류는 좌익이었다.때문에 50,60년대초 일본 신문들은 좌익의 입장에서 한반도를 보도했다.6.25 북침설이 학계의 주류 를 이룬 가운데 한국에 대한 「감정적 거리」는 북한보다 멀어져 있었다.
한국을 가장 심하게 비판한 신문은 아사히(朝日)였다.아사히를맨 왼쪽에 놓았을 때 그 반대편에 산케이(産經),중간쯤에 요미우리(讀賣).마이니치(每日)신문이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韓日수교 직전인 65년2월21일「한단계를 넘어선 日韓관계」란제목의 아사히신문 사설에는 『일본은 한국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와도 우호관계를 맺길 원한다.북한을 일부러 무시하는 일은 있을수 없으며…』란 대목이 나온다.역사적 한일수교에 대한 평가보다북한에 대한 배려와 신중한 일본 입장을 촉구한것이었다.
한일수교(65년6월22일)가 이뤄졌지만 일본 신문들의 친북(親北).반한(反韓)자세는 70년대 초반까지 별로 변하지 않았다.71년11월17일부터 12회에 걸쳐 아사히에 게재된 「주체의나라 북조선」과 72년4월15일부터 6월1일까지 32회에 걸쳐요미우리에 게재된 「수상과 인민-영도의 예술가 김정일」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기사였다.
70년대 일본 신문들의 반한(反韓)논조와 관련,이와나미(岩波)서점 발간의 잡지「세계」의 영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세계」는 「한국에서 온 통신」이란 글을 73년5월호부터 87년까지 실었다.TK生이란 익명의 한국인이 기고한 형 태의 이 글은 당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종속경제를 주된 테마로 해 일본 지식인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당시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박정희(朴正熙)정권의 독재를 장기화시킨 72년의 「10월 유신」을 비판하고 한국의 민주화.민중운동에 대해 공감.동정하는 분위기가 강했다.73년8월 반한무드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일어났다.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이었다.이 사건은 金씨에 대한 일본 여론의 동정 차원을 넘어섰다.전후 일본은 국가주권을 논하는 것을터부시 했다.金씨 사건은 국가주권을 처음 부각시킨 셈이었다.
그 이후 일본 신문들의 차가운 시선은 80년 광주사태 때까지계속됐다.이같은 흐름을 바꾼 것은 아웅산사건(83년)과 KAL기 폭파사건(87년)이었다.두 사건 모두 북한 소행임이 밝혀지자 친북일변도의 신문논조는 바뀌지 않을 수 없었 다.KAL기 폭파사건은 완전히 반북(反北)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아웅산사건때만 해도 대부분의 신문이 서울發로 북한 관여說을 중심으로 기사를 썼으나 아사히는 「북한이 관여부인」(83년10월13일)이란 제목을 뽑았다.70년대 후반부터 일본 신문의 對한반도 기사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정치일변도의 기사에서 문화.사회 등을종합적으로 보는 기사들이 하나둘 게재되기 시작했다.일본 신문의한국에 대한 선입관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꾼 것은 88년서울올림픽이었다.
맨 왼쪽에 있던 아사히까지 방향을 선회했다.
요즘의 한반도 보도태도는 객관성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역력히 엿보인다.국제정치적 시각에서 북한의 핵문제와 권력이양문제를 다룬다.오움진리교 간부살해사건의 주범인 재일 한국인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은 채 사건의 본질을 쫓은 것 등은 한국 에 대한 불필요한 자극을 자제한 보도태도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東京=金國振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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