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스페인 폭탄테러가 몰고 온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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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 11일 마드리드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아토차 역에서 연쇄폭탄테러가 발생했다. 201명이 사망하고 150여명의 중상자를 포함, 총 1700여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스페인 유력 일간지인 엘문도는 "마드리드가 울고 있다"라고 썼다. 전 세계인과 함께 스페인은 비통함과 분노에 잠겼다.

스페인에서 테러와 전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36~39년 3년 동안 계속된 시민전쟁에서 100만명의 희생자를 낸 스페인은 이후 36년간 지속된 프랑코 총통의 통치 아래 숨죽이고 살았다. 그러나 75년 프랑코 총통 사망 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의 노력에 힘입어 의회주의와 지방분권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하지만 이 기간 중에도 분리주의자인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의 테러 공격으로 군인과 경찰 등 수없이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하지만 이런 스페인에서도 이번 테러가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96년 집권한 우파 국민당(PP) 정부가 강력한 테러 대응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아왔는데 이번 테러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국민당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에 영국과 함께 가장 확실한 유럽의 지지자였다. 2003년 2월 여론조사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스페인인 92%가 반대했으나 국민당은 안보와 경제적인 면을 고려해 이라크에 1300여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또 지난해 11월 스페인 정보장교 7명이 이라크에서 살해됐을 때도 국민당의 의지는 분명했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국민당은 42%로 사회노동당(PSOE)을 4~5% 이상 앞서왔다. 누구도 집권여당의 재집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 결과 42.6%의 지지를 받은 사회노동당이 164석을 얻어 148석을 얻은 국민당에 승리한 것이다.

무엇이 스페인 민심을 하루 아침에 바꿔놓은 것일까? 총선 승패의 열쇠는 지난 11일 발생한 연쇄폭탄테러 사건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정부는 사건 정보를 완전히 공개하지 않았으며, 이번 테러를 ETA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범행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투표 몇 시간 전 열차 폭탄테러 배후가 알카에다 소행임을 주장하는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되는 등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서 민심이 급변한 것이다. 왜 스페인군이 이라크에서 살해돼야 하고, 또 스페인 내에서 수백명의 스페인인이 테러에 희생돼야 하는지, 그리고 정부는 이 사실을 왜 솔직하게 공개하지 못하는지 스페인 국민은 쉽게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거짓말과 테러의 결합이 스페인의 정권교체를 가져온 것이다. 스페인의 이번 정권교체는 현 국제질서에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첫째, 미국의 대 이라크 전략에 차질을 가져오게 된다. 사파테로 사회노동당 당수는 이라크에 주권이양 뒤 유엔이 다국적군의 지휘권을 갖지 못할 경우 1300여명의 스페인군을 6월 말까지 철수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는 갈수록 이라크 수렁에 빠지고 있는 미국의 입장을 한층 어렵게 하는 것이다.

둘째, 철군 도미노 현상을 불러올 수 있다. 이미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온두라스도 군 철수를 발표했으며, 니카라과.엘살바도르 등 중미국가들도 추가 파병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이러한 파장이 이라크에 파병 중인 33개 국가를 포함한 국제사회 전반에 미칠 것은 틀림없다. 셋째, 미국을 포함해 각국 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번 테러는 이라크 전을 지지한 미국 동맹국들에 대한 첫번째 선거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을 포함, 인도.스리랑카.필리핀.호주에서 선거가 예정돼 있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의 재선가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끝으로, 유럽 정치지형의 변화가 예상된다. 사파테로 당수는 미국의 일방적인 주도권을 견제하고 유럽의 이해를 확대하기 위해 유럽의 단결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향후 스페인은 친미노선에서 벗어나 친 유럽적 정책을 펼칠 것을 천명했다. 2000년 7월 22일 당수에 당선된 사파테로는 "조용하고, 신중하며, 질서있는 변화"를 주장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해 놓은 우리로서는 앞으로의 상황전개를 정말 신중하게 지켜볼 일이다.

송기도 전북대 교수.중남미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