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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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중기(1957~)의 '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

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
문을 열면 능금밭 가득 능금꽃이 아찔하게 피어 있는
그 풍경 아득하게 바라보며 비명을 치는 노파
어깨 한쪽 맥없이 문설주로 무너진다
그 모습 힐끗 일별하던 네 살박이 손주놈이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중얼거리며 나자빠진다
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



초문이다. 세상에 근심.걱정은 지천이지만 꽃이 피었으니 어찌 살 것인가, 하는 걱정은 처음 듣는다. 능금꽃이 필 때는 봄이 가장 아득할 때. 바람에 능금꽃들이 펄펄 날릴 때면 이승의 어떤 슬픔도 다 부질없어 보일 때. 그런데 우리 할머니, 어깨 문설주로 맥없이 기울어지며, 꽃은 피고 이제 우에 사꼬…. 깊이 한숨 쉬시는 우리네 할머니. 너무나 환한 봄 세상에 가슴 저릿저릿 아려오는 우리 할머니. 살아온 날들 가슴 속 산불로 활활 타올라 더는 꽃 보지 못하고 주저앉는 할머니. 목젖에 걸린 메아리처럼 아지랑이 쉬엄쉬엄 과수원 언덕을 넘는 봄날.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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