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美, 승강이 끝 비공개 각서로 ‘우라늄 문제’ 넘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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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 12면

8일 싱가포르에서 북한의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 문제에 대해 잠정 합의한 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왼쪽)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미 국무부는 북한의 합의 이행에 대해 신중한 입장인 데 반해 북한 외무성은 미국의 정치적 보상 조치(테러지원국 해제 등)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고 못 박았다. 싱가포르·베이징 로이터·AFP=연합뉴스

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지난 두어 달간 고난의 나날들을 보냈다. 보기 좋게 바람을 맞은 적도 있었다. 지난달 1일 베이징에서 북한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달 13일 제네바에서 이뤄진 북·미 협의 때는 더 속이 상했을 것이다. 김 부상이 마지막 순간 다 된 밥에 퇴짜를 놓고 평양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외교가에선 그의 사임설까지 돌았다. 힐의 인내력이 거의 소진돼 가던 시점에서 김계관은 핵 프로그램 신고 문제에 성의를 보였고, 둘은 그 해결 방안에 잠정 합의했다. 8일 싱가포르에서였다. 지난 연말로 정해진 시한을 석 달 이상 넘긴 끝에 북한 비핵화 2단계 조치의 핵심인 핵 프로그램 신고가 타결 국면에 들어선 셈이다.

북핵 신고 ‘싱가포르 잠정 합의’ 어떻게 나왔나

신고 문제의 쟁점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프로그램(UEP)과 시리아에 대한 핵 확산 의혹이었다. “다 알고 있으니 자백하라”는 미국과 “없는 일을 어떻게 자백하느냐”는 북한의 입장은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이었다.

이 가운데 UEP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첨예했다. UEP 문제는 2002년 10월 촉발된 2차 북핵 위기의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는 북측에 “북한이 무기급 우라늄을 농축하는 것은 1994년의 북·미 제네바 합의 위반”이라고 추궁했다. 켈리의 추궁은 정보기관의 분석이 바탕이 됐다.

북한은 “우리는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고 반발하면서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제네바 합의로 동결했던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는 초강수로 맞섰다. 그 이후 북한은 보관 중이거나 원자로에서 태우고 난 사용후 핵연료봉을 재처리해 핵 물질인 플루토늄을 추가로 만들어냈고, 2006년 10월엔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그런 만큼 미국은 UEP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자백을 반드시 받아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할 경우 미국이 엉터리 정보로 북한을 몰아붙이고 제네바 합의를 파탄시켰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 NPT 탈퇴의 구실을 만들어줌으로써 “혹(우라늄)을 떼려다 더 큰 혹(플루토늄)을 붙였다”는 비난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UEP 문제는 6자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진실성과 신뢰성을 가늠하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북한은 북한대로 5년 반 동안 일관되게 “생사람 잡는다”고 주장해 오던 것을 하루아침에 뒤집기가 힘들었다. UEP 갈등이 진실 게임의 양상을 띤 이유다.

미국 입장에선 시리아와의 핵 협력 의혹을 훨씬 더 심각한 우려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 9월 이스라엘 공군이 시리아의 사막 지대에 있던 원자로를 폭격해 날려버리면서였다. 당시만 해도 북·미 대표들은 “북한은 핵 물질, 기술 또는 노하우를 이전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미국 내의 여론은 훨씬 더 강경했고 과거 활동에 대해서도 명확히 규명할 것을 요구했다. 핵 확산, 특히 중동지역에 대한 핵확산을 금지선(레드 라인)으로 삼는 정책 때문이었다.

두 가지 쟁점을 둘러싼 접점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올 초부터 논의하기 시작한 아이디어가 ‘비공개 의사록’ 방식이었다. 플루토늄 핵개발은 정식 신고서를 6자회담 참가국에 제출하고 UEP와 핵 협력은 북·미 간의 합의서인 의사록으로 대체하는 방안이었다. 의사록에는 미국이 파악하고 있는 북한의 의혹 사항들을 적시하고 북한은 미국의 우려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긴다. 북·미 양측은 이 의사록에 담을 표현의 수위를 놓고 줄다리기를 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 활동에 대해 최대한 구체적 사실을 적시하자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가급적 개략적이고 모호한 표현을 고집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북·미 양측은 승강이 끝에 싱가포르에서 ‘북한은 미국의 우려를 인정하고(acknowledge), 기술된 사실들에 도전하지(challenge) 않는다’는 선에서 합의했다는 보도다(자유아시아방송).

양측이 타협할 수 있었던 것은 “UEP에 막혀 북한 핵 문제의 본령인 플루토늄 핵 개발 중지와 핵 폐기 협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선 아직 무기급 농축 단계에 이르지 못한 UEP보다 추출량이 30㎏을 넘어선 플루토늄이 더 시급한 해결 과제였다. 그러려면 하루 빨리 북핵 폐기 2단계인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와 신고 문제를 마무리 짓고 3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자칫 신고 문제가 더 늦어질 경우엔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2단계조차 완료하지 못하게 될 우려도 있었다.

북한은 테러지원국이란 멍에를 풀고 북·미 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합의안에 동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의 의도는 싱가포르 회동 이튿날 발표한 외무성 대변인의 논평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의 정치적 보상 조처와 핵 신고 문제에서 견해 일치가 이룩됐다”고 공표했다. 싱가포르 회동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뤄졌다고 못을 박았다. 북한 측 주장의 핵심은 핵 신고에 맞춰 미국이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고 적성국교역법 적용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 두 사안이 대외관계 개선과 경제원조를 끌어낼 수 있는 첫걸음이란 인식에서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반면 미 측 반응은 신중하다. 힐 차관보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아직 ‘합의’가 이뤄진 상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라이스는 11일 “북한이 북핵 신고의 의무를 이행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과정에 있다”며 “우리는 북한이 그 의무를 충족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독일 외무장관과의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다. 이는 싱가포르에서의 회동 결과에 대한 행정부 내 강경파와 의회의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미 행정부가 내건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가 아니라는 평가가 대세를 이룬다면 부시 대통령은 이를 최종 추인하기 힘들다. 힐 차관보는 미국의 국내 절차에 앞으로 2∼3주일가량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의회와 행정부 내 설득 작업에 주력하겠다는 의미다.

미국 행정부의 최종 승인이 떨어지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해야 한다. 신고서 제출과 동시에 미국은 테러지원국 해제 등을 위한 공식 절차에 들어가고, 관계국은 신고에 대한 검증을 시작하게 된다. 동시에 6자회담 참가국은 회의를 열어 그 다음 단계인 핵 폐기의 로드맵을 짜는 작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과거 핵활동에 대한 검증은 쉽지 않다. 신고와 검증의 불일치가 생기면 그 과정은 얼마든지 지연될 수 있다. 핵무기를 포함한 핵 폐기는 그 이후의 일이다. 이제부터는 핵 불능화, 신고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라고 6자회담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아무리 빨라도 5년은 잡아야 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싱가포르에서의 잠정 합의는 비핵화를 향한 여정에서 하나의 고비를 넘긴 것에 불과하다. 산을 하나 넘고 나니 거대한 산맥이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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