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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현 회장이 뭔데 ‘현대 적통’ 잇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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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 첫 시찰단의 모습. 정상영 KCC 회장도 참석했다(가운데 회색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정상영 회장).

이코노미스트없어질 수도 있었던 현대건설은 정 회장의 ‘절대 간판 못 내려!’ 이 한마디로 살아났다. 절대 못 내린다는 것은 저항이 아니라 다짐이었고 되살려야 한다는 집념의 외침이었다. 거기에 셋째 아우 정순영 회장과 매제인 김영주 회장이 집까지 팔아 정 회장의 집념에 힘이 되어준 것이다.

“고령 쪽에 나루터밖에 없었거든요? 그 당시 인삼이 거기서 많이 나왔는데, 수송이 참 불편해 정부가 전후 복구 차원에서 건설을 하라고 했지만 우리야 간판 안 내려야 한다는 것 외엔 다른 거 생각할 여유가 아무것도 없는 형편이었어요. 명예회장님은 절대 회사 못 닫는다고 그러시지, 빚쟁이들은 매일 찾아와서 공갈 협박하지, 얼마나 절박했는지 몰라 사실, 허허.”

김영주 한국프랜지 명예회장은 악몽 같은 기억밖에 없다고 했지만 결국 현대건설은 형제들과 인척이 집을 처분해 살려냈고, 재기를 노릴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간 셈이었다. 물론 이때의 고령교 사건이 정씨 일가를 더욱 뭉치게 하는 ‘혈의 끈’이 됐을 것이다. 이춘림 전 회장도 핏줄의 끈끈한 농도는 어떤 기업도 현대가(現代家)를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언급했다.

“명예회장님이 하시는 일이고, 집안에서는 아버지 같은 존재기 때문에 어떡하든 살려야 한다고 마음을 모았겠지만 그 당시 집이 아니라 몸의 장기라도 팔아야 한다고 했으면 형제들이건 김 회장(김영주)이건 아마 다 나서서 도왔을 겁니다. 그렇다고 명예회장님이 집 팔아서 보태라는 말은 절대 안 하는 양반이지요. 그런데도 가진 것 다 내놔요. (현대가 사람들은)그런 정도로 보면 돼요. 고령교 공사 때가 현대건설로서는 경험도 없었던 시절이고 해서 가장 심한 타격을 받았지만 그 공사뿐 아니라 그 후에도 현대건설에 몇 번 위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소위 정씨들이나 김 회장이 나서는 걸 보면 대단하거든? 그건 꼬집어서 설명하기 어려워요. 하여간 빚잔치를 어느 정도 했을 때쯤에 내가 내려가 보니까 김영주 회장하고 이연술씨, 이연술씨는 훗날 현대를 나가셨는데 그런 분들이 전쟁 복구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현대건설 복구를 하느라고 눈이 쑥 들어갔어요. 피골이 상접했다고 그래야 되나?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면서 현대건설을 지켰어.”

-현대건설에 대한 애착이 영(永)자 항렬의 형제들에겐 남다르겠군요.
“사실상 첫 사업이고 명예회장님의 혼이 담긴 기업이니까 애착이야 말할 수 없는 거지요. 영자 항렬만 그러나? 그때 고생한 사람은 다 똑같은 심정이지. 아, 김영주 회장도 항렬은 다르지만 영(永)자가 들어가네? 하하. 하여간 그 후에 미군 공사와 고령교만 가지고 안 되니까 다시 수복되고 나서 수원비행장, 김포, 이런 비행장들을 하게 되고 지금은 건교부라고 하지만 그때는 내무부 안에 건설국으로 돼 있었는데 거기서 발주하는 공사, 가창댐 공사도 그 무렵에 땄지만 그렇게 해나가면서 간판 안 내린 것만 다행으로 생각하고 점차 회복하면서 나온 거지요.”

현대건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최근 다시 부상하고 있는 현대건설 매각 문제에 대해 현대가 사람들의 마음은 착잡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의 장기까지도 팔 마음먹어

그동안 금융권 내부의 이견과 대선이라는 정치적 행사 등으로 수면 아래 있었던 현대건설 매각 문제는 매각에 따른 시장의 지각변동과 매각 후 공적자금 문제와 결부된 국민 정서 등을 생각할 때, 새 정부 정책이 안정적인 틀을 잡은 이후인 연말께 논의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다.

특히 2007년 11월 예금보험공사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포함한 8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기 때문에 최종 판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마저 있는 만큼 연말 이전에 매각 시도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대건설 주주협의회 주관은행인 외환은행이 지난 3월 24일, 이르면 3월 28일 운영위원회를 소집하고 매각 자문사 선정 등을 공식적으로 올릴 예정이라고 밝히면서 새로운 관심사로 부상한 것이다.

물론 매각 자문사 선정은 외환, 산업, 우리은행 등 운영위원회 회원 중 2개 이상 은행이 찬성하면 가능하지만 1대주주인 외환은행이 외국계가 대주주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실질적인 1대주주로 볼 수 있는 산업은행이 자문사 선정 시기에 대해 이견을 보여 온 만큼 외환은행의 뜻대로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하지만 이미 현대건설 인수를 공식적으로 밝혀 온 현대그룹 등을 포함한 대형 그룹사들의 관심은 높아만 가고 있다.

거기다 지난 3월 20일 금융위원회가 산업은행 민영화 방안을 밝힌 것도 현대건설 매각을 조기에 점화시킨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갖게 했다.

자문사 선정 시기에 대해 신중을 기해 온 김창록 총재의 특이한 안목과 상관없이 산업은행을 민영화할 경우 현대건설을 포함한 비금융 기업 보유지분을 빨리 털어내 비만증에 걸려있는 몸집을 줄여야 한다는 현실론에 직면하기 때문에 현대건설 매각 시기를 연말로 고집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매각작업이 본격화할 경우 인수합병(M&A) 시장에 그동안 잠복해 있었던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불 것이 예상되지만 현대건설 매각 시그널이 울린 만큼 그동안 현대가를 뜨겁게 달구어왔던 현대건설 인수 문제와 관련된 1차 비화를 처음으로 공개하고 현대건설 영욕의 60년을 계속한다.

2차는 현대중공업그룹과 현대그룹이 현대상선 경영권을 놓고 논쟁을 벌였던 2007년 4월께 부각된 이른바 ‘정주영 유훈’과 관련된 비화가 될 것이다.

아무튼 2001년 5월 18일, 국내 최대의 건설회사인 현대에 대해 채권단은 감자에 이은 출자전환을 단행함으로써 54년의 역사를 끝으로 2조9000억원의 적자와 4조4000억원의 부채를 안고 현대건설은 산업 영웅으로 존경 받았던 ‘정주영의 혼’과 정씨 일가의 품을 떠나 채권단 관리로 들어간다.

그 후 5년여, 매출액 4조2800억원, 순익 3265억원을 기록하며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을 졸업하고 곧 매각에 들어갈 것이라는 소문이 재계를 흔들어 놓았던 그 무렵이다.

채권단이 워크아웃 졸업을 결정한 것은 2006년 5월이지만 이미 2005년 12월, 공식적으로 현대건설 인수 의향을 처음 밝힌 것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었다.

정주영 회장이 타계하면서 현대그룹은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건설이 빠진 현대상선 중심의 현대그룹 등 모두 소그룹으로 개편됐고, 현대그룹을 장악한 현 회장은 임원회의를 통해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현 회장의 뜻이 확고하다고 확인하자 일시에 현대가의 적통성(嫡統性) 논쟁에 불이 붙었다.

사실 현 회장의 현대건설 인수 의지가 공개적으로 언론을 통해 드러나기 전까지 범현대가 내부에서는 채권단의 발표를 기다리면서 정중동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현대건설 M&A 스케줄 발표(당시 채권단은 2006년 2월로 발표 예정)를 2~3개월 앞둔 시점에서 정상영 회장을 포함한 범현대가 전체의 논의(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이 2005년 10월 타계하고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그 당시 생존해 있었지만 건강 문제로 현대가의 현안들은 대부분 정상영 KCC 명예회장 중심으로 논의됐다)도 거치지 않았는데 정씨 회장이 아닌 현씨 회장의 울타리 안에서 그 같은 발언이 공식화되자 벌집을 건드린 격이 된 것이다.

“그 직후지요. 김영주 회장이 정상영 회장(KCC그룹 명예회장)을 불렀어요. 화가 몹시 났지요. 현대건설이 어떤 회사고 정 회장 형제들이나 김 회장이 가지고 있는 현대건설에 대한 애정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 아니오. 그런데 느닷없이 현 회장 입에서 현대건설을 먹겠다는 소리가 나왔단 말이에요. 혈압이 오르지. 사실 그분들한테는 현대건설이 채권단 손에 들어갔다는 것도 IMF가 왔기 때문이라기보다 소위 ‘왕자의 난’을 일으켜 대외신인도가 떨어지는 바람에 자금난에 몰려 망하게 됐다, 그런 심정이 더 깊단 말이오. 왕자의 난 중심에 누가 있었어요? 몽구 회장과 몽헌 회장인데, 건설은 몽헌 회장 지휘 하에 있었잖아요. 똑같이 난을 일으킨 중심에 있었지만 자동차그룹은 승승장구하는데 건설은 뭐냐 이거지. 그래 놓고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현 회장이 욕심을 내니까 화가 치밀지 않겠어요?”

현정은 - 정상영 싸움으로 번져

▶김영주 한국프랜지 회장.

정주영 회장을 오래 모셨고 범현대가 인맥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온 L회장은 곁가지 없이 핵심적인 내용만 설명했다.

-현대가의 적통성에서 벗어난 사람이 나섰다는 것이 불쾌한 이유였습니까?
“결론은 그렇게 봐야 되는데, 처음엔 집안에서 공론화를 거치지도 않고 있는 걸 현 회장이 명예회장님의 적통을 잇는다고 제 멋대로 나선 거 아니냐 이거지. 김 회장 같은 분한테는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그룹이 커지고 어쩌고 그런 차원은 전혀 생각에 포함되는 게 아니에요. 현대건설이 없어졌다는 게 얼마나 분했겠어요. 더구나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몽헌 회장이 가지고 있다가 넘어갔고. 근데 현 회장이 뭔데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되는 거고, 그런 분기(憤氣)가 결국 ‘네가 적자냐’ 하는 걸로 연결되니까 다시 생각해도 분하다, 그렇게 될 거 아니오.”

-정상영 회장을 부른 이유는 뭡니까?
“네가 인수하라 이거지요. 정 회장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라 그거요. 김 회장님이 매형이고 사실상 울산의 대부 아니오. 명예회장님도 안 계시고 셋째도 돌아가시고 둘째는 건강 때문에 집안 문제에 신경을 못 쓰고, 그러니 김 회장님이 방향을 다 잡아요. 그래가지고 상영 회장이 고민을 많이 하셨고 인수를 한다는 각오까지 했어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5.54%를 처분하고 울산방송, 현대산업개발 주식, 그러고 자사주까지 처분하면서 실탄 확보에 나섰다고 할 때가 그때입니까?
“실탄 확보는 그 시점에서 반드시 상영 회장님만 할 이유가 사실 없었다고 봐요. 김 회장님 지시면 범현대가가 다 나서면 되니까. 내가 볼 땐 그랬어요. 그러니까 상영 회장님이 꼭 현대건설 인수 때문에만 처분했다고는 안 보는데,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하여간 이건 좀 다른 얘긴데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은 다른 감정이 좀 있어요. 엘리베이터 지분 때문에 정 회장님하고 현 회장 사이에 감정이 생겼어. 무슨 얘기냐 하면, 정 회장님이 현 회장한테 오해를 많이 받은 거야. 처음에 정 회장님이 엘리베이터 지분을 구입할 때, 사실은 몽헌이를 도와주려고 했던 거요. 몽헌 회장 빚이 600억원이나 되니까 상영 회장이 나서서 내가 200억, 형님(정세영 회장)이 100억, 몽구 회장 200억, 누구 회장 100억, 그런 식으로 도와줘야겠다고 해서 구입을 했던 건데 현 회장은 엘리베이터를 먹으려고 한다고 말이야, 그게 아니었거든. 정말 돕자고 나섰던 거예요. 그건 내가 잘 알아요.”

-그런 감정들이 좀 쌓여 있었군요.
“하여간 뭐 그랬는데 어쨌든 상영 회장님이 인수 방침을 굳히면서도 그게 작은 문제가 아니니까 고민을 계속하다가 하루는 나를 불러요. 가서 만났더니 사적으로는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는데, 현대건설 인수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거요. 그래서 내가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세 가지 이유를 말씀 드렸어요. 첫째는 엘리베이터 도와주려다가 집을 빼앗으려 한다는 소리까지 다 들어놓고 또 어떤 비난을 들으려고 그럽니까. 둘째는 KCC 안에도 종합건설이 있잖느냐, 그걸 키우면 되지 5조가 넘을 텐데 현대건설 인수해서 뭐 할 겁니까. 이 얘기 할 때는 언성을 높이시대. ‘야, 돈만 생각할 현대건설이야?’ 하하. 셋째는 현대건설이 조직은 큰데 오랫동안 주인이 없어서 다 썩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네가 매형(김영주)한테 가서 그렇게 얘기해!’ 그러시더라고, 하하하. 그러고 얘기가 좀 더 있지만 결국 채권단에서 매각 발표가 나오지 않아서 중단됐지요. 근데 이번에 다시 매각 얘기가 나오더구먼….”<계속>

이호 객원기자·작가 leeh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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