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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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바다 운명의 발소리(3)악을 써대는 시라가와의목소리를 들으면서 인부들은 부시럭거리며 일어섰다.공습경보라도 내리면 그 핑계로나마 잠시 쉴 수 있다는 게 지상에게는 스스로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일이었다.죽이자고 폭탄이 떨어지는 판인데그 걸 남의 일인양 접어두면서 편안히 쉬고 있다니.공습 덕분에쉴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건데도 누구하나 거기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 없다.앞 사람의 뒤를 따라 땅굴을 걸어나오는 지상의 뒤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
『어쩌자구 저렇게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는 거여.』 시라가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루 세 끼 먹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말이여.』 『모르는 소리.하루 너댓 끼 처먹고 살겠다고 저러는 거 아니겠어.』 『제놈 하나 더 처먹고 굵은 똥 싸겠다고 지랄하는 거야 누가 뭐라나.그 등쌀에 우리만 죽어나니까 하는 소리지.』 『사람이 욕심빼고 나면 뭐가 남는 줄 알어? 백냥 가진 놈이 열냥 가진 놈의 거 한푼이라도 더 뺏어야 하는 게 사람 욕심인데.』 고개를숙이고 걷던 지상의 발밑이 조금씩 환해졌다.땅굴이 끝나면서 밖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앞 사람을 따라 행렬을 이루면서 지상은 밖으로 나섰다.산기슭에 흙을 버리고 서서 그는 이마의 땀을닦아냈다.작업장 뒤로 이어진 가파른 산 에서 불어온 바람을 맞으며 서서 지상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지상의 뒤에서 흰 모자를 쓰고 인부들의 인사를 받으며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길남이었다.그가 히죽거리며 지상에게 다가섰다. 『너 여기 있었냐? 폭약 다루는 조에 있는 걸로 알고 한참찾았지.』 『날? 왜?』 눈살을 찌푸리며 길남을 마주보던 지상의 눈길이 그의 옷차림을 훑어내려갔다.
『무슨 일이야? 그런 옷을 해가지고… 조선에라도 나갈 일이 있나?』 두 사람을 흘끔거리는 인부들을 돌아보다가 길남이 지상을 끌어 한쪽으로 비켜서게 했다.모자를 벗어 손에 들면서 길남이 말했다.
『왜 요즘 통 얼굴을 안 보여?』 『자네한테 아침저녁 문안인사라도 드리라는 건가.그렇다면 미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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