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맥하는 ‘한의사 로봇’ 나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진맥기는 팔목을 올려놓으면 자동으로 맥을 짚으며, 28가지의 맥 종류 중 중요한 10가지를 정확하게 알아낸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설진기는 황태<上>와 혼합태<下> 등 설태를 정확하게 구분해 낸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의료연구부 김종열(49) 박사는 한의학의 과학화를 개척하고 있는 한의사로 꼽힌다. 현대 과학으로 만든 진단기기가 한의사들의 진단을 대신할 수 있게 하자는 구상을 현실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환자들의 임상 결과와 한의사들의 경험을 데이터베이스화해 로봇이 맥을 짚고, 혀에 낀 설태의 종류와 이목구비 분별을 정확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의사의 감각의 차이로 오는 오진을 최소화하고 사상의학적 체질 분류도 표준화된다. 그가 주도해 개발하고 있는 한의학 진단 장비는 로봇 진맥기, 설진기, 얼굴 분별기 등이다. 이미 로봇 진맥기와 설진기는 실험 시제품이 개발됐으며, 얼굴 분별기는 지난해 개발이 시작됐다.

그는 “진맥과 설태 구분, 얼굴의 안색과 이목구비의 형태만 제대로 분별해도 환자의 상태를 상당 부분 파악할 수 있다”며 “로봇 진맥기와 설진기가 한의사들보다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말했다.

◇로봇 진맥=맥은 굵기와 강약을 함께 짚는다. 로봇 진맥기는 환자가 손목을 맥진기 판에 올려놓으면 맥이 뛰는 곳을 스스로 정확하게 찾아 짚는다. 그는 현재 알려진 28가지의 맥 중 10가지를 로봇 진맥기가 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팀은 진맥을 하는 방법과 구별법을, 한 벤처기업은 기기를 만들었다. 김 박사는 “한의사의 머리에 해당하는 로봇 진맥기의 핵심 알고리즘은 연구팀이 개발하고, 한의사의 손에 해당하는 로봇 진맥기의 하드웨어는 기업이 만든 셈”이라고 설명했다.

맥 중 부맥(浮脈)이라는 것이 있다. 맥이 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맥의 특성은 처음 살짝 눌렀을 때는 맥이 강하게 짚이지만 세게 누르면 맥이 거의 짚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에너지가 쉽게 소진되는 사람으로 빨리 지친다. 로봇 진맥기는 부맥을 비롯해 침맥·대맥·세맥 등 10가지를 한의사들보다 더 정확하게 짚었다.

◇설진기=한의학에서는 혀에 노란 설태가 낀 사람은 소화기가 안 좋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장기에 열이 차 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환자들을 진찰할 때 설태의 종류를 파악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흔한 설태는 어느 한의사가 봐도 동일한 소견을 보이지만, 백태나 홍태·황태 등 여러 설태가 섞여 있을 때는 소견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김 박사는 “기계는 감정이나 주변 분위기에 따라 좌우되지 않기 때문에 설태를 정확하게 구별해주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3000여 명의 임상 자료를 활용해 설진기를 개발했다.

◇얼굴 분별기=한의학에서는 턱이 뾰족한 여성은 자궁이 약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두 눈 사이의 콧날이 낮은 사람은 심폐기능이 약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때문에 한의학에서 안색과 함께 이목구비의 생김새도 중요하게 다룬다. 김 박사는 현재 1000여 명의 자료를 확보했으며, 앞으로 2년 동안 약 1만 명의 사례를 더 분석해 얼굴 분별기를 개발할 예정이다.

김 박사는 “표준화된 한방 진단기만 잘 개발해도 한의학의 발전과 신뢰성 확보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김종열 박사는 공학도서 한의사로 변신

김종열(사진) 박사는 서울대 건축학과와 KAIST 대학원 토목과(석사)를 나온 공학도 출신이다. 그런 그가 한국건설연구원의 연구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30세가 넘은 나이에 다시 경희대 한의대를 들어가 한의사가 됐다. 한의학에 매료돼서 그랬다는 것이다.

“26세까지 앓던 설사를 한의원에 갔더니 고쳐주겠다고 했습니다. 일반 병원에서는 못 고친다고 했거든요. 그러나 한의원을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나아버렸어요.”

그는 그 길로 한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설사를 낫게 해준 한의사는 “공학도 출신의 경우 한의학이 체계화되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여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며 한의대 진학을 말렸다. 김 박사는 한의학 대학 교재를 사본 결과 그 한의사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그의 한의대 진학을 포기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되레 ‘한의대에 진학해 한의학을 과학화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때의 결심을 그는 지금 하나씩 현실로 옮기고 있는 중이다. 그는 사상의학의 대가이기도 하다. 원불교 좌산 이광정 상사에게 사상의학을 사사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