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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 소담수목원, 애걔! 하다가 와아!! 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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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에서 묵는 하룻밤, 누구나 별과 꽃과 나무와 바다의 주인이 된다.

카페에서 내다본 안뜰.

성만기 원장과 부인 이상숙씨

꽃을 보고 ‘예쁘다’하긴 쉽습니다. 하지만 그 꽃을 피우느라 흘린 누군가의 땀과 눈물까지 읽어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기자가 딱 그랬습니다. 봄꽃 소식을 들으려고 찾아간 남녘의 한 수목원. 기대가 컸던 데 비해 첫인상이 솔직히 좀 그랬습니다. 꽃이 있긴 했지만 듬성듬성했습니다. 수목원이라고 보기엔 규모도 작아 보였습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돌아서려는데, 뒤늦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성글게 피어난 자연스러운 꽃들이, 부러 그렇게 꽃을 가꾼 누군가의 ‘아름다운 고집’이.

<경남 고성> 글=김한별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남해고속도로 진성IC를 빠져 나와 통영 쪽으로 달리다 보면 늘씬한 다리가 하나 나온다. 경남 마산시 진전면과 경남 고성군 동해면을 잇는 동진대교다. 다리를 건너서면 구불구불한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지난해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한 곳으로 뽑은 그림 같은 드라이빙 코스다. 맞은편 산자락에 입간판 하나가 보인다. ‘소담수목원, 소담카페, waterfront wonderland’.

흰색 울타리 입구를 지나 경사로를 오른다. 좌우가 환하다. 밝은 연두색 황금실향나무 곁에 노란색 꽃이 무리를 지어 펴 있다. 두 종류다.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건 개나리, 살짝 처진 자루에 소복이 술이 달린 건 삼지닥나무 꽃이다. 드문드문 붉은 빛도 보인다. 핏빛 동백, 진분홍 진달래.

언덕마루에 올라서니 동화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작고 귀여운 카페가 있다. 주변 경치는‘와’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장군산을 등지고 왼쪽은 노인산, 오른쪽은 동진대교, 다리 밑을 지나 당항포로 흘러드는 앞 바다는 파도 한 점 없이 잔잔하다. 한데 경치 구경을 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도대체 수목원은 어디 있는 걸까?

카페 뒤는 그냥 ‘산’같다. 쭉 뻗은, 하지만 막 가지치기를 끝낸 듯 ‘헐벗은’ 소나무 군락이 있고, 뒤는 무성한 활엽수림이다. 볕 잘 드는 터에는 드문드문 꽃이 피어 있다. 수선화가 있고 복수초가 있다. 입구에서 봤던 진달래, 흔치 않은 흰 동백도 보인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30년 홀로 가꾼 수목원

“한 색깔, 한 종류로 쫙 깔면 얼핏 보기엔 그럴 듯하겠죠. 하지만 유치하잖아요? 리브참나무 곁에 잎갈나무, 모감주나무가 자라고, 개복숭아꽃·수선화가 섞여 피는 게 진짜 자연입니다. 저는 그런 수목원을 만들고 싶어요.”

성만기(62) 소담수목원장은 신랄했다. 그리고 당당했다. 사실 말은 맞는 말이다. 놀이공원 화단에 한 색깔로 한 모양으로 빽빽이 피어 있는 꽃들은 죄다 ‘인스턴트’다. 비닐하우스에서 일찍 꽃을 틔워 옮겨 심는다. 땅 속엔 열선이나 온수파이프를 깔고, 시든 꽃은 두 번 세 번 ‘갈아 끼운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찾아가는 게 사람 심리다. 예쁜 건 예쁜 거고, 허전한 건 허전한 거 아닐까?

“회사 생활하면서 지구를 700바퀴쯤 돌았어요. 외국의 좋다는 수목원엔 다 가봤죠. 제대로 된 수목원을 보려면 100년쯤 기다려야 합니다. 이곳은 이제 겨우 30년이에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압니다. 그래서 관광농원 허가를 받고서도 입장료를 안 받는 겁니다. 언젠가 제대로 된 수목원을 보여줄 수 있게 되면, 돈은 그때나 받을 겁니다.”

성 원장은 대한항공 수석 사무장 출신이다. 2000년 이사로 퇴직했다. 수목원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갯마을에서 태어나 중학교는 마산, 고등학교는 부산, 대학은 미국에서 나왔다. 그리고 들어간 직장이 항공사. 오랜 객지생활 동안 성 원장은 나무를 벗해 살았다. 외국만 나가면 수목원·종묘상을 찾아다녔다. 남이 키운 나무를 사다 정원을 꾸미는 대신 빈 땅에 외국서 구해온 종자를 심고 나무를 길렀다. 일부는 잘 자라 돈이 됐다. 골프장 조경수로도 팔려가고 다른 수목원 터 잡는 데도 쓰였다.

성 원장은 그렇게 번 돈과 직장생활 짬짬이 짜낸 시간을 몽땅 고향 야산에 쏟아 부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같이 멋진 나무들로 가득한 수목원을 갖고 싶어서.” 비행을 다녀와 잠시 쉴 틈이 생기면 어김없이 내려와 나무를 심고, 돌을 나르고, 못질을 했다. 조경 설계도 직접 했다. 은퇴한 뒤론 아예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와 살았다. 가족도 한뜻으로 거들었다. 스튜어디스 출신인 부인은 카페 ‘사장’, 부산서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아들은 주말마다 달려와 서빙과 홈페이지 관리를 도왔다. 그렇게 30년. 아들이 태어난 1978년 처음 나무를 심었던 고향 땅 야산은 오늘의 소담수목원이 됐다.

별빛 쏟아지는 수목원, 캠핑카에서의 하룻밤

소담수목원은 결코 작지 않았다. 전체 부지가 11만5703㎡(3만5000평). 뒷산 산책로를 30분쯤 오르면 당항만의 일출도 볼 수 있다. 구석구석 나무와 꽃을 돌아보는 사이 어느새 어둠이 내렸다.

성 원장이 캠핑카에 불을 켰다. 원장 내외는 방 두 칸짜리 고향집에서 노모를 모시고 산다. 손님이 찾아오면 재울 곳이 필요했다.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필 때마다 경치가 달라지잖습니까? 한 곳에 고정돼 있는 집보다는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있는 캠핑카가 낫다 싶었습니다.” 지금은 5인승 한 대뿐이지만 곧 7~8인승을 한 대 더 들여놓을 계획이다. 독일제 캠핑카 안에는 이층 침대 하나와 더블 침대 하나, 화장실과 주방이 갖춰져 있다. 예약을 하면 바비큐용 그릴과 연료도 제공한다.

캠핑카 앞 데크에 올랐다.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스름 푸른 빛에 잔물결 하나 없이 고요한 게 꼭 유리알 같다. 아직 산 바람이 차가운지 진달래가 사르르 몸을 떤다. 좀 있으면 산수국·산달나무·붓꽃·꽃창포·기린초도 볼 수 있을 게다. 여름에는 보랏빛 벌개미취가 피어난단다.

“자, 우리는 이제 갑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소담수목원 주인이 되시는 겁니다.”

성 원장 내외가 탄 차가 산 아래로 내려간다. 별빛 찬란한 바닷가 수목원에는 한 사람의 30년 땀과 눈물이 배인 나무와 꽃, 진돗개 담비와 라브라도 리트리버 렉스, 서울서 찾아온 손님만 남았다.

Tip

■ 소담수목원의 사연과 사진은 홈페이지(www.sodam.org)와 성만기 원장 아들의 블로그(www.cyworld.com/seannu)에서 구경할 수 있다.

■ 수목원 입장료는 없다. 나무와 꽃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면 미리 연락을 하고 찾아가는 편이 좋다. 꽃이 가장 좋은 시기는 4월말부터 6월까지, 카페에서는 커피와 허브차 등을 판다. 오전 11시부터 해 질 때까지만 오픈. 캠핑카 이용료는 주중 12만원, 주말 1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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