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호북극리포트>10.북극의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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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6월9일(90일째)화이트 아웃,남서풍,0℃(좌표 N85°00′12"/W73°21′06") 북극도 여름이다.지난 5월 보름께부터 기온이 영하5도 안팎이더니 급기야 어젯밤 진눈깨비와 비가 내렸다.
얼음이 녹아 온 천지가 개수면 투성이며 얼음판위에 덮인 눈도습기를 잔뜩 머금어 썰매 끌기가 배나 어렵다.며칠전부터 운행복과 장갑을 벗어버리고 아예 내복차림에 맨손으로 썰매를 끌고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중간중간 운행을 중단하고 눈목 욕으로 땀을 식힌다.깨끗한 눈을 한 움큼씩 집어 엉덩이와 겨드랑이를 문지르는 것은 우리들만의 즐거움이다.북극에서 알몸이 된다는 것을 딴사람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6월10일(91일째)화이트 아웃,남서풍,-1℃(좌표 N84°53′37" /W72°03′03") 오후에 레졸루트 베이스캠프 및 미국의 윌 스티거팀,폴란드 팀과 교신.윌 스티거팀은 우리보다 3~4일 빨리 극점을 통과,현재 87도선을 운행중이며 폴란드팀은 지난달 24일 극점 도달에 성공했다는 소식이다.우리는 전파상으로나마 서로 축하인사를 교환했다.레졸루트의 터줏대감베이젤 제수데이슨에 따르면 올해 러시를 이룬 북극원정대 중 미국과 폴란드,한국팀만「성공적」이라고.제수데이슨은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팀이 가장『기록면에서 앞서고있다』며『꼭 성공하라』고 덧붙인다.
지난 3월 러시아 베이스캠프에서 만난 허버트 메스너가 떠오른다.라인홀트 메스너의 동생인 그는 우리 장비에 관심이 있는 듯이것 저것 꼼꼼히 따져 물었다.메스너 형제는 올해 3차에 걸친북극해 도전을 모두 실패로 돌렸다고 들었다.이 들은 모두 뛰어난 알피니스트다.왜 그들이 북극까지 왔는가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기록에 대한 욕심만 가지고는 진짜 프로라 할 수 없다.그것보다는 벌거벗은 자연과 만나 부대끼고 시달리면서 농축된 상태로 삶의 희열을 확인하고 싶은 고질 병이 북극해에서 도졌을 것이다. 아직 육지가 보이지 않지만 나는 우리의 성공을 확신하고있다.이제 불과 보름 남짓이면 우리는 워드헌터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만큼 나는 마음 속으로 실패한 자들에게 경의를 보낸다.육지가 가까워진 탓인가 .오늘밤유난히 사람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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