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어느 경영자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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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통령의 회견 직후 대우건설 남상국 전 사장이 투신 자살했다. 회견에서 직접 거론된 터여서 더욱 안타깝다. 그동안 쌓였던 번민과 수치심이 순간적으로 폭발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그런 극단적 방법을 택한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못 견뎠다는 뜻이다. 개인적 의지의 강약을 말하기 앞서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간 시대적 상황과 비정함이 원망스럽다. 이번 일만 없었으면 대우건설을 기사회생시킨 유능한 경영자로서 기억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필요한 경영자 자산의 손실이기도 하다.

南사장은 꼭 30년 전에 대우건설에 입사해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한계단씩 올라간 전문 경영인이다. IMF 사태 후 사장직을 맡아 죽을 고생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하면서 오랜 동료들도 잘라야 했을 것이고 위험을 각오하고 모험도 했으리라 짐작된다. 어떻든 대우건설은 빈사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을 되찾았고 南사장은 지난해 말에 주택 건설에 대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그동안의 힘들었을 삶이나 최근의 고뇌를 생각할 때 너무 허망한 결말이다. 기업에서 최고경영자가 되고 그 일을 잘한다는 것은 보기만큼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비상한 노력과 재능이 있어야 하고 운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실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격변기엔 희생자가 생기게 마련이지만 요즘 너무 빈번하다. 누군들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럼없이 살고 싶지 않겠는가. 이 땅에서 삶을 이어가고 무슨 일을 하려는 사람들 너무 고달픈 것 같다. 사회 전반에 잘못된 관행과 비정상이 너무 많고 원칙이나 법에 못지않게 정이나 의리가 매우 중시된다. 심지어 아주 높은 분들조차 "정치자금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고 공언하고 또 그렇게 짐작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요즘 들어 도덕적 기준은 매우 높아졌고 세상의 심판은 추상 같다. 대선자금 문제만 하더라도 지난 대선이 과거에 비해 훨씬 돈이 적게 든 선거였다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다. 그러나 옛날엔 그냥 넘어갈 것도 이번엔 심한 추달을 받았다. 그만큼 세상은 밝아지고 투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오래 살아온 현실과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 기준 사이에 괴리가 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과 규정이 없다. 그 틈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다.

대우건설은 불법 정치자금 문제로도 조사를 받았다. 워크아웃 기업이 비자금을 조성해 뿌렸다는 것이다. 왜 그런 무리를 했을까. 대우그룹 몰락 이후 주요 경영자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고 재산 차압을 당했다. 그걸 뻔히 보면서 무리를 한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워크아웃 기업은 부탁할 데가 많고 약한 입장이니 공사를 따고 기업이 살기 위해 영향력 있는 곳에 로비를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몇년 전 비슷한 처지에 있던 동아건설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 전례가 있다. 부실기업을 맡은 책임자로서 냉정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것이 마침 대선자금 수사와 맞물려 강도높은 추궁을 받았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인간적 고뇌를 했을 것이다. 거기에 겹쳐 인사청탁 건이 터지고 그것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됐다.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한 곤혹은 혼자 겪는 일도 아니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인사건은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해도 자신의 이름이 그런 식으로 만천하에 공개되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선량한 사람에겐 명예나 자존심이 목숨보다 더 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염치나 체면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후흑(厚黑)들이 우글거리는 현실에서 정말 슬픈 일이다.

이 비극이 여기서 끝나려면 투명해지는 사회에 맞춰 모든 시스템이 고쳐져야 한다. 인사가 공명 정대해져 청탁 같은 것이 통할 여지가 없어져야 하고 정치 자금 주고받는 것이 제도적으로 돼야 한다. 물론 그 전에 워크아웃 기업에까지 손벌리는 몰염치나 권력자 주변이 인사청탁에 얼씬거리는 행태가 없어져야 한다. 한 기업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