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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리니케 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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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대 중국의 병서 '손자(孫子)'는 백전백승을 최고로 치지 않는다.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을 최고의 승리라고 했다.

하지만 전쟁을 할 경우 반드시 이겨야 한다며 승리를 위한 다섯가지 조건을 들었다. 무엇보다 싸울 수 있는 경우와 싸워서는 안 되는 경우를 알라고 했다. 또 병력이 많고 적음에 따라 적절한 용병을 할 줄 알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같아야 이긴다고 했다. 이어 조심스럽게 준비하는 자가 승리할 수 있다고도 했다. 끝으로 장수는 유능해야 하고 군주는 간섭하지 않아야 승리한다고 설파했다. 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유명한 구절도 나온다. 나와 상대방을 잘 비교해 승산이 있을 때 싸우면 백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읽어봤거나 귀동냥으로라도 한번쯤 들었을 법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탄핵을 둘러싼 정쟁에선 이 가르침이 영 통하지 않는 듯하다.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키웠다는 점에서 여야 모두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다.

또 여야 간에 깊이 파인 대립의 골엔 대화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싸움을 할 때 하더라도 대화 창구는 은밀하게나마 늘 열어두는 것이 좋다. 그래야 나중에 수습하기 쉽다.

살벌한 냉전시대에도 미국과 소련의 첩보기관은 은밀한 협상 창구를 두고 있었다. 이를 통해 체포된 정보원들을 비밀리에 교환하곤 했다. 장소는 독일 베를린 근교의 글리니케 다리였다. 구 동독과 서베를린을 잇는 곳이다.

1962년 소련은 억류 중이던 미국 정찰기 U2기의 조종사 프랜시스 파워스를, 미국은 KGB 요원 루돌프 아벨을 이곳에서 처음 맞바꿨다. 영화처럼 다리 양쪽에서 동시에 마주보며 걸어가게 했다고 한다. 그후 양국은 이곳에서 가끔 '인사 교류'를 했다. 소련에 구속돼 있던 인권운동가가 미국이 잡은 소련 간첩과 교환돼 풀려난 적도 있다.

이 때문에 글리니케 다리는 '은밀한 협상'을 상징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부정적인 뜻만은 아니다. 대립하는 당사자가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 딱 감고 머리를 맞댄다는 뉘앙스가 있다.

손자병법도 안 먹히는 우리의 정치판엔 임시 글리니케 다리라도 걸쳐 놓아야 하지 않을까.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