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링 영웅 정지현, 4년 만에 다시 꾸는 금빛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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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현은 서울 서소문에 있는 중앙일보사의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1호선 전철을 타고 태릉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알아봐서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4년 전에 잠깐 그런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정지현이 말하는 ‘4년 전’은 아테네올림픽이 열린 2004년이다. 그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0㎏급을 제패했다. 연예인 MC몽을 닮은 얼굴 때문에 인기를 얻었다. 아이스크림 광고에도 출연했다. 이제 스물 다섯 살이 된 정지현을 기억하는 시민은 많지 않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전철역으로 통하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툭툭, 어깨를 부딪치며.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본 정지현의 표정은 다양했다. 2004년에 보여준 순진한 소년 또는 개구쟁이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 2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레슬러의 강인한 이미지를 벗겨낼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든 것이다. 그런데 정지현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루 네 번 훈련하고 쉬는 시간엔 책을 읽거나 인터넷 검색, 게임을 한다. 4년 전이나 똑같다”고 말했다.

4년 전은 어땠나. 금메달을 걸고 돌아온 정지현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순진해 보이는 표정에 반한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다투어 그를 섭외했다. 정지현이 출연한 아이스크림 광고도 코믹 버전이었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MC몽이 “심심한데 붕어빵이나 사먹자”고 제안하자 정지현은 “아니, 국화빵. 난 채식주의자거든”이라고 대답한다. MC몽과 정지현이 ‘국화빵’처럼 닮았다는 데 착안한 광고였다.

CF 출연료로 6000만원을 받았다. 모두 부모님께 갖다 드렸다. “돈 쓸 곳이 없어서”였다. 소속팀 삼성생명이나 태릉선수촌에서 먹고 자는 그로서는 돈 쓸 일이 따로 없다. 그는 아테네올림픽 우승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포상금을 받으면 어떻게 쓰겠느냐”고 묻자 “500만원만 떼고 부모님께 드리겠다”고 대답했다. 처음엔 “5만원만 떼겠다”고 했다가 기자들이 박장대소하자 500만원으로 올렸다. 그는 포상금 1억4400만원 중 정말 500만원만 떼고 부모님께 드렸다.

올림픽이 끝나고 잠깐이지만 인기를 실감했고, 그 인기가 돈이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심권호가 한참 인기를 모으던 때였고, 정지현은 연예 프로그램에서 ‘먹힐 만한’ 캐릭터였다. 그러나 몇 군데 출연해본 그는 곧 방송국 출입을 접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유명한 사람을 자주 만나고, 아는 사람도 많아지고, 재미있더라고요. 그런데 자꾸 그런 일을 하면 레슬링을 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레슬링이 뭐기에 정지현은 인기나 돈, 그리고 재미(!)를 포기해 버린 걸까. 정지현은 “제가 잘할 수 있는 건 레슬링뿐이라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정지현은 정말 레슬링 외의 운동을 할 줄 모른다. 대개의 레슬러는 축구나 농구 같은 구기 종목에도 능한데, 정지현은 잘하지 못한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해방 후 첫 금메달을 딴 양정모도 레슬링 외의 운동에는 재주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선수들은 결국 운동신경보다 노력으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다.

레슬링 선수들은 4년에 한 번, 올림픽의 해에 꿈을 꾸고 그 꿈이 이뤄지기를 염원한다. 대한민국이 “아, 레슬링이란 게 있었지” 하고 기억하고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기다. 꿈을 이룬 레슬러는 잠시 스타가 되었다가 곧 평범한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반말로 해설하는 심권호를 보며 웃지만 곧 잊는다. ‘빳데루 아저씨’도 그렇게 잊혀져 갔다. 정지현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만은 없다. 갈 길을 가는 것뿐이니까.

정지현이 2008년 3월에 분명히 말하는 목표는 베이징올림픽 우승뿐이다. 아테네에서 월계관을 썼을 때 그는 즉시 2연속 우승으로 목표를 재설정했다. 베이징마저 평정한다면? 정지현은 자신의 다음 목표를 분명히 말하지 않지만, 무엇이 목표가 될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올림픽 3연속 우승. 레슬링을 타고난 정지현에게 다가오는 대회들은 매일의 끼니와도 같다. 점심밥을 먹고 나면 저녁도 먹어야 한다.

사실 정지현의 목표는 ‘전설’이나 ‘신화’가 되겠다는 얘기다. 그는 “모든 게 똑같다”고 하지만 똑같은 경우는 없는 법이다. 4년 전 정지현은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는 유망주였고, 우승후보가 따로 있었다. 이제 정지현은 타깃이다. 금메달을 다툴 만한 상대는 사사모토 마코토(31·일본)와 다비드 베디나드제(23·그루지야). 특히 상승세를 타고 있는 신예 베디나드제는 경계해야 할 선수다.

진짜 강적은 따로 있다. 컨디션. 보통 선수들이 5~6㎏ 감량해 체중을 맞추지만 정지현은 10㎏이나 뺀다. 체중 유지가 어려워 잠시 66㎏급으로 뛴 적도 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감량만 성공적이라면 상대가 누가 되더라도 해볼 만하다.

허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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