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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주말 산책] 재즈는 흘러갑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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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39면

심기일전하여 몸이 파김치가 될 때까지 걸어 보려 했는데 십 분도 못 가 느닷없이 너른 하천이 나타났다. 한강으로 흘러드는, 아마도 왕숙천일 것이었다. 산책로는 하천을 따라 오른쪽으로 휘돌아 이어졌다. 1㎞쯤 저편에 작은 다리가 보였다. 거기까지 가 다리를 건너 단조로운 찻길을 따라 지금 코앞에 보이는 대안(對岸)까지 걷는 건 내키지 않았다. “어떻게 할래?” 내가 묻자 친구는 우선 좀 쉬면서 생각해 보자며 둥근 콘크리트 의자에 걸터앉았다. 머리 위에 높다랗게 걸쳐져 있는 고가다리 그늘 아래였다. 바람이 선뜩했다. “여기 여름에 무지 시원하겠다.” 내 말에 친구는 “아니다. 여름에 무지 더울 거다. 겨울에 추운 곳은 여름에 덥다”며 그다운 비관주의를 펼쳤다.

“저기에 인도도 있을까?” 친구가 고가다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있겠지.” 우리는 너무 높아 염두에 없던 고가다리 밑을 서성거리다, 진창을 피해 발을 내딛고 잡초 덤불로 뒤덮인 축대를 타고 올라갔다. 우리 앞서 다른 개척자가 있었던 듯 담배꽁초가 잔돌 틈에 떨어져 있었다. 가파른 비탈을 에돌아 길 위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쌩’ 하니 성마른 바람을 일으키며 트럭이 지나갔다. 오롯한 인도를 걸으며 우리는 의기양양 발아래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간간이 차가 지나갈 때마다 발 밑 상판이 부르르 떨었다. 트럭이나 시외버스나 죄다 삼십여 년 저쪽에서 달려오는 듯 어쩐지 빛 바래 보였다. 그 좀 삭막한 정조를 음미하며 건너편에 이르려는 순간 아연실색할 일이 생겼다. 인도가 뚝 끊겨 버린 것이다. 사방이 강물 같은 차도였다. 아니, 이럴 걸 왜 인도를 만들어 둔 거야? 아마도 삼십여 년 저쪽 시절엔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 뒤 찻길들이 봇물처럼 터지며 범람해 인도를 끊어 놓은 모양이다. 몇 갈래의 찻길 어디에도 횡단보도 하나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누군가? 용기가 아니라 ‘귀차니즘’으로 무장해 우리는 임전무퇴의 전사가 되었다. 적군(자동차)이 안 보이는 틈을 타 소용돌이치는 세 개의 길을 건너 우리는 기어코 강변을 찾아 내려왔다. 두 번째 길 아래에서는 몇 마리 말을 볼 수 있었다. 비좁아 보이던데, 말 사육장인가? 말한테 좋은 환경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다시 강변을 따라 한들한들 걸었다. 흠! 문득 아득한 햇빛과 귓전에 찰랑거리는 바람이 더없이 달콤했다. 반짝이는 강물과 텅 빈 하늘, 서쪽으로 가없이 펼쳐진 풀밭, 케니 지의 테너 색소폰 소리가 대기 속을 나부꼈다. 소리를 추적해 보니 날렵한 새 모양의 스피커가 은빛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강을 향해 놓인 상냥한 벤치 중 하나를 골라 다소곳이 앉았다. 다른 재즈 연주가 이어졌다. 재즈는 한밤의 진득진득한 실내음악이라고만 여겨온 건 내 편견이었다. 재즈는 한낮 야외의 풍경을 허심한 듯, 산만한 듯 채색하는 음악이기도 했다. 영원 비스무리한 시공간에 들어선 듯 하염없이 마음이 잦아들었다.

그곳은 구리시의 강변이었다. 구리시에 대해 뭉클한 호감을 늘어놓던 친구가 벤치에서 일어나 목운동을 하며 거닐다 “뱀 조심!” 하고 외쳤다. 내가 펄쩍 뛰자 그는 낄낄 웃었다. 벤치와 은빛 기둥 사이에 있는 도랑은 마른 덤불로 덮여 있었다. 거기 ‘주의! 뱀 출몰지역’이라고 적힌 팻말이 꽂혀 있었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 뱀들이 뒤엉킨 몸뚱어리들을 슬슬 풀고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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