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기관장 선임 제도부터 바로 세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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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노무현 정권에서 임명된 정부 산하기관장들의 거취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여당 측에서는 이제 새로운 이념의 정부가 들어섰으니 뜻이 맞는 사람끼리 일할 수 있도록 과거의 사람들은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반대편에서는 법이 정한 임기를 무시하고 사퇴를 압박하는 것은 월권 행위라며 반발하는 형세다. 사실 노무현 정권의 코드 인사는 유별나서 거친 말과 함께 민심이반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과학기술계만 하더라도 과학기술부총리제 도입과 연구개발 예산의 확충 등 과학기술계의 오랜 염원을 많이 해결해 주었으나, 몇몇 정부 산하기관장 선임에서 전문성을 무시한 인사를 해 인심을 잃었던 것이다.

하지만 법에서 정한 기관장의 임기는 보장해야 한다는 명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 논란은 뚜렷한 승자 없이 이전투구의 양상으로 지루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제도가 개선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5년마다 이러한 논란이 재연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될 개연성이 농후하다는 점이 문제다. 이러한 혼란의 근본적 원인은 정부 산하기관장의 선임 방법에 있다.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는 기관장이 공석이 되면 소위 민간 전문가를 중심으로 ‘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해 3명 내외의 후보자를 추천하게 한 후, 이들 후보 중에서 이사회 투표를 통해 신임 기관장을 선임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실세 권력자가 후보를 낙점하고 정부를 대표하는 이사나 후보추천위원을 통해 그 의사를 관철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후보자들은 기관 운영에 대한 미래 비전을 마련하기보다 권력층에 줄을 대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후보추천위원회와 이사회의 민간 전문가들은 유능한 후보자를 가려내고자 하는 의욕을 잃고 피동적으로 행동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기관의 경우에는 후보자들을 면접조차 하지 않고 신임 기관장을 결정하는 일도 있었다. 대학 신입생을 뽑는 데에도 심층면접을 하는데, 한 기관을 수년간 운영할 수장을 선임하는데 그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면접조차 하지 않는 것이 말이 되는가.

새 정부에서는 이처럼 허울뿐인 기관장 선임 제도를 대폭 손질해 투명하고 책임있는 기관장 선임 제도를 운영해야 할 것이다. 우선 후보추천위원회와 이사회에 명실상부한 권한을 주고, 정부는 부적격자만 골라내는 보조적 역할로 물러나야 한다. 아무리 정부에 많은 정보가 모인다 하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모두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사에 막후 실력자가 개입하면 이번 국회의원 후보자 공천처럼 잡음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성이 중요한 기관의 경우에는 민간 전문가들에게 그 기관을 가장 잘 운영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내게 하고, 이렇게 선출된 기관장은 정권이 바뀌어도 그 임기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반면 기관장의 이념적 성향이 중요하다고 판단되거나 정부가 전략적 개혁을 시도하고자 하는 정부 산하기관이 있다면, 후보추천위원회의 요식행위를 거치기보다 차라리 정부에서 책임지고 직접 기관장을 임명하고 그 임기를 정권과 같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새 정부가 들어선 지 한 달이 지났다. 정부가 서서히 자리가 잡혀가면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산하기관장 인선작업도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진행되는 정부 산하기관장 인사는 아직도 과거의 과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물론 아직 초기라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정부의 신뢰성이 훼손되고 5년 후 다시 코드 인사라는 역풍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긴다.

옛말에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하였듯이, 유능한 인재를 기관장으로 선임하는 것이 정부 산하기관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하루빨리 공정하고 명분있는 인사가 이뤄지도록 정부 산하기관장 선임제도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 자연대학장·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