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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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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10년 2월 어느 날. 한 통의 전보가 조선통감부의 소네 아라스케 통감에게 도착한다. 발신자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중국 뤼순에 설치한 통치기관 관동도독부였다. “안중근의 사형 집행일을 3월 25일로 결정하였으므로 이를 통지함.”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해 숨지게 한 안 의사의 재판 결과가 확정된 데 따른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사형 예정일은 건원절(乾元節), 즉 순종 황제의 생일과 겹쳤다. 사실상 주권을 이미 빼앗긴 대한제국이었지만 그래도 황제는 황제였고, 통감부로선 무엇보다도 민심의 동요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소네 통감은 사형 집행일을 하루 늦출 것을 요청해 관철시켰다. 이토의 피격일과 같은 날짜(26일)를 골랐다는 통설을 뒤집는 내용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일본 외교사료관의 공개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3월 25일, 옥중의 안중근을 두 동생 정근·공근 형제가 찾아온다. 안중근은 “나는 내 할 바를 다한 것이고 어차피 각오하고 한 일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노모 공양을 당부했다. 형장에서도 안중근은 의연했다. “그의 태도는 너무 침착하여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종용자약(從容自若)하게 죽음에 임했다.” (당시 통역 소노키 스에키의 기록) 안중근은 마지막 남길 말을 묻는 형무소장에게 “내가 일면식도 없는 이토를 미워서 죽인 게 아니라 오로지 동양 평화를 위해서 한 일”이라며 “동양 평화 만세”를 합창하자고 제의한다. 물론 마지막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안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이 25일부터 중국 뤼순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100년이 가깝도록 후손된 도리를 못한 죄를 씻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더불어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본격적인 안중근 전기를 쓰는 일이다.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해방 전 박은식 선생이 쓴 전기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전기가 여러 종류 나와 있지만 새로운 사료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정확한 고증을 거친 전기는 거의 없다는 게 연구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가령 안 의사가 거사 전날 술을 마시며 비장한 심정을 토로했다는 기술도 있다. “조국 광복의 날까지 술을 끊겠다”고 맹세하고 실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앞서 예를 든 사형 집행일도 잘못된 해석이 퍼진 사례의 하나다.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많은 기념사업이 펼쳐지겠지만 핵심은 역시 제대로 된 전기 편찬사업이 아닐까 싶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