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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Leisure] 땅끝 해남, 春色에 물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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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후반 충청도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 때아닌 폭설이 내리고 한겨울 같은 추위가 몰아닥치는 바람에 계절이 잠시 거꾸로 가는 듯했다.

말 그대로 '봄이 왔으나 봄답지 않았다'(春來不似春). 하지만 봄은 동장군의 시샘을 아랑곳하지 않는 법. 대지에 흠뻑 밴 봄기운의 완숙함에 비하면 꽃샘 추위는 앙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내렸던 눈은 대부분 녹아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그리고 눈 녹은 물은 봄을 더욱 살찌우고 풍성케 하는 자양분이 됐다.

그 덕에 남녘의 봄은 화사해져 봄빛 잔치가 시작됐다. week&은 봄을 불러온 빛깔, 봄이 흠뻑 담긴 빛깔을 찾아나섰다.

봄맞이를 나선 발길은 한반도 육지의 최남단, 즉 땅끝이 있는 해남(전남 해남군)을 향했다. 백(白). 황(黃).녹(綠), 해남의 춘삼색(春三色)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해남=성시윤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 매화 이불 덮은 보해농원

해남군 산이면 예정리의 보해 매실농원.

전국에 매화를 심은 농원이 여러 곳 있지만 이곳이 규모가 가장 크다. 2월 말부터 봉오리를 연 매화는 이번 주말부터 일주일 정도가 절정기다. 그러니 이맘 때 해남의 봄빛 중 으뜸은 구릉을 덮은 하얀 '매화 이불'이다.

구불구불한 농로를 1.8㎞ 따라가 당도한 농원. 농원 내 흙길 양편에는 동백.측백.편백나무가 빼곡히 서서 좌우를 가리고 있다. 바람을 막아주는 울타리 삼아 심은 것들이다.

성급한 매화 몇송이가 방풍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뿐 아직 농원의 규모를 실감할 수 없다. 전국 최대라더니. 농원 한쪽 주차장(200대 규모)에 차를 세우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선다.

드넓은 벌판이 흰 구름에 덮였다 할까, 하얀 안개에 휩싸였다 할까. 이런 풍광을 '매운'(梅雲)이나 '매무'(梅霧)라 불러도 좋을까. 지치도록 걷고 또 걸어도 이곳 매화를 모두 볼 수는 없다. 농원 규모가 14만평이며, 10평당 한 그루씩 1만400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으니.

이곳은 1978년 보해양조에서 매실을 수확하기 위해 조성했다. 매화나무는 현재 10 ~ 22년 정도의 나이를 먹었다. 평상시에 7명의 농원 직원이 매화나무를 돌보지만, 매실 수확기인 6월 중순에는 이 일대 주민 500명이 일주일을 매달려야 매실을 다 딸 수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매실은 소주에 담가져 5년간 숙성을 거쳐 시중에 나온다.

매화밭은 전반적으로 평평한 데다 매화나무가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심어져 있다. 그래서 매화 밑에서 돗자리를 깔아놓고 낮잠을 자거나 식사를 해먹기에 좋다. "불을 안 내도록 조심하고 쓰레기만 버리지 않으면 삼겹살을 구워 먹어도 상관 없다"는 게 농원 측 입장이다.

제대로 매화를 즐기는 비결. 사람이 많이 모이는 한낮보다는 아침이나 저녁 나절에 가보시라. 낮에는 잘 맡을 수 없던 매향(梅香)이 참으로 그윽하다. 그래서 매화 구경은 낮에는 눈이 즐겁고, 아침.저녁에는 코가 즐거운 법이다.

*** 여행 쪽지

서해안고속도로 목포나들목→영암방조제→해남 방향 806번 지방도로 순으로 가면 '보해 매실농원' 이정표를 볼 수 있다. 농원 진입로는 폭이 좁으니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없는지 조심할 것. 농원(061-532-4959)은 입장료 무료. 식당은 해남읍 초입의 한정식집 진일관(061-532-9932)이 추천할 만하다. 1인분에 1만5000원. 농원에서 차로 30분 거리.

*** 생명의 어머니 황토

해남 땅은 넓다. 전라남도의 시.군 중에서 가장 크다. 그러면서도 기름지다.

최근 봄갈이를 마치고 파종을 기다리는 해남의 황토밭. 매화만큼이나 반가운 봄 풍경이다.

황토밭을 '봄'풍경이라 하는 것은 겨우내 일군 밭농사 때문이다. 매년 9월 말 ~10월 초에 심어 12월 말에서 이듬해 3월까지 수확하는 겨울배추의 전국 생산량 중 8할이 해남에서 나온다.

삼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해류의 영향을 많이 받아 겨울에도 따뜻한 날씨가 유지된다. 그래서 사시사철 산물이 풍부하다. 남도 음식이 모두 맛있지만 해남 음식이 특히 유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검붉다'는 표현이 오히려 어울리는 황토밭은 이곳에 태어난 사람에게, 이곳을 지나간 시인.묵객들에게는 시심(詩心)의 태반이었다. 그래서 해남이 낳은 여류 시인 고정희(1948 ~91)가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땅의 사람들-봄비'중)고 했다. 역시 해남 출신인 민족시인 김남주(1945 ~94)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 봄을 기다릴 줄 안다/기다려 다시 사랑은 / … / 봄의 언덕에 / 한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중) 했던 것도 황토밭을 떠올린 것인가(두 시인은 모두 삼산면에서 태어났다).

황토밭은 해남의 서부를 관통하는 77번 국도 주변에 많다. 해남의 서부는 평야 지대이고, 동부에는 산악 지형이다. 그리고 77번 국도의 끝, 그러니까 황토밭이 끝나는 곳에 육지의 최남단 땅끝 마을(송지면 갈두리)이 있다. 땅끝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뭇 시인이 이곳을 다녀갔고, 이곳에 대한 시를 썼다.

'땅끝에 / 왔습니다. / 살아온 날들도 / 함께 왔습니다. / 저녁 / 파도 소리에 / 동백꽃 집니다'(고은 '땅끝')

황토밭을 기웃거리며 땅끝까지 가는 길. 내내 가슴이 뛰었다. 봄기운에 취해버렸나.

*** 여행 쪽지

2002년 땅끝마을에 지어진 땅끝전망대(061-530-5544.입장료 1000원). 날씨가 쾌청한 날에는 전망대에서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땅끝마을에서는 땅끝바다횟집(061-534-6422)의 음식이 깔끔하다.

*** 연두빛 들판 보며 차 한잔

보해 매실농원의 매화나무 아래, 그리고 황토밭 언저리에서 또 다른 봄빛깔을 발견할 수 있으니, 바로 연초록이다. 매화나무 아래서 자라는 봄나물이다.

우선 광대나물. 20 ~30㎝ 높이로 훌쩍 자란 줄기 끝에 원통형의 분홍 꽃이 머리를 들었다. 흰꽃을 피우는 황새냉이도 무더기로 자라 있다. 그냥 냉이와 달리 줄기가 10 ~30㎝ 높이로 자라는 놈들이다. 그래서 매화나무 바닥은 푸른 융단을 깐 듯하다.

그리고 땅끝마을로 가는 길목의 황토밭 두둑에는 어김없이 냉이와 갓이 방석처럼 잎을 펼치며 자라고 있다.

해남에서 초록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또 다른 곳은 두륜산(703m) 자락의 대흥사(大興寺.삼산면 구림리)다. 다성(茶聖) 초의선사가 40여년간 머물며 선다일여(禪茶一如)를 실천했던 일지암을 끼고 있는 곳. 조계종 22교구의 본사로 전남 서남해안 지역의 여러 절을 아우르는 큰 절이다.

초의선사가 이곳에 머물렀기에 대흥사는 다산 정약용.초의 선사.추사 김정희.소치 허유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명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추사 김정희가 한때 폄하했다가 유배 뒤에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됐다는 조선 후기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모두 볼 수 있는 것도 재미있는 대목. 이광사의 글씨는 대웅보전의 현판에, 추사의 글씨는 요사채의 현판에 남아 있다.

더욱이 대흥사는 일찍이 서산대사가 입적 전에 삼재(三災)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꼽아 당부한 덕에 서산대사의 가사와 바리때(바루)를 보관한 절이다. 그래서인지 대흥사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도 큰 피해를 면해 온전한 모습을 보전하고 있다.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생각하면 쉬 자리를 뜰 수 없는 절이다.

경내의 찻집에 앉아 봄나들이로 가빠진 숨을 고른다. 투박한 찻잔 속. 찻잎이 우러나는데, 연초록빛이 이 안에도 있네.

*** 여행 쪽지

대흥사에 가려면 두륜산도립공원 주차비(2000원)와 관람료 (2500원)를 내야 한다. 사하촌의 식당 중에서는 전주식당(061-532-7696)이 유명하다. 주차장(061-534-5503)에서 대흥사까지 걸어서 8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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