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그럼 나중에 애 낳은 다음에 봅시다.』 민우가 미련없이 일어섰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약속이 당겨졌소.우리가더이상 할 얘기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을 사랑해요.』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소.』 『당신이 필요해요.』 『난당신이 필요하지 않소.그럼….』 민우가 마지막 인사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여자는 멀뚱하게 민우를 바라보았다.같이 온 친구들이 여자에게 눈짓을 했다.그들의 눈빛은 「이미 애까지 배었는데 구태여 지금 붙잡아서 남자 비위를 거스를 필요가 있겠는가.
애가 있어도 이혼하 는 사람 쌔고 쌨는데….지금은 편안히 내버려 두어라.나중에 애 난 다음에 꽉 잡는 거다」라고 말하는 것같았다.민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거머리 같은 년.철저하게 남자한테 붙어서 피를 빨아먹고 피말라 죽게 하는 년.니가 밴 아이는 가성 임신(pseudocyesis)이야,설사 임신 반응 테스트에서 양성이 나왔다고 해도그 임신은 가짜야.우리가 마지막 섹스를 한 것이 언젠데….그리고 나는 확실히 질외 사정을 했고 내 질외 사정 피임률은 1백%야.』 가성임신은 히스테리 증상의 하나로 정신의학에서 처음 보고된 것은 프로이트가 「안나 O」라는 환자를 분석하면서였다.
그 여자 환자는 의사에게 색정 전이(erotic transference)를 일으키면서 마치 정말 임신이라도 한듯한 신 체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민우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한편으로는미안하기도 했다.여자가 그렇게 된 것은 민우 책임도 컸다.여자의 취약한 현실에 비해 너무 받아준 것이 문제였다.민우가 받아준 만큼 여자는 더욱 더 약해졌으니까.그러나 이제는 모두 옛날일이다.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우리는 악연답게 서로 주고받은 것이다.앞으로 여자는 홀로 서지 않으면 히스테리에서 못벗어날 것이고,민우는 민우 나름대로 손상된 현실을 복구할 부담이 있었다.그러나 돈이야 있다 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지….문제는 그 정도 대가로 악연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홀가분했다.민우는 상쾌하게 홍대 입구를 배회하다가 다시 그 카페로 돌아왔다.카페로 돌아오니 그네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런데이상한 일이 벌어 졌다.민수 형 사모님과 채영이 같이 앉아 있는 것이다.민수 형 사모님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채영은 정색을 하고 있었다.민우는 그들의 살벌한 기색에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근처 자리에 가서 앉았다.채영의 차가운 목소리 가 들려왔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거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