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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26<스티코프비망록>8.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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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47년 9월 제2차 美蘇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되자 남과북에서는 독자적인 정권수립 움직임이 가속화됐다.美군정은 한반도문제를 유엔에 상정했고,이에 반대해 蘇군정과 북한은 美蘇양군의철수를 주장하며 독자적인 정권수립을 추진했다.
이미 1947년 2월 선거를 통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결성한 북한은 순조롭게 정권수립의 기초를 마련해나갔다.
47년 11월18일 북조선인민회의 제3차 회의는 독립에 필요한 국가조직을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임시헌법 제정에 관한결정」을 채택했다.48년 2월8일 정식으로 인민군이 조직됐다.
48년 4월과 6월 두차례에 걸쳐 통일정부수립을 내세운 남북연석회의가 추진됐으나 성과없이 끝났다.5월10일 남쪽에서는 총선거가 실시됐다.
蘇군정의 북한정권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스티코프비망록』4권은 이러한 시점,즉 48년 7월부터 9월까지 蘇군정 최고지도부의 움직임을 숨김없이 보여준다.이 시기에 가장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북한정권수립과 관련된 정부.
최고인민회의 구성 및 인선문제,2개년 경제계획 수립 및 북한.
소련간의 경제협력 문제,그리고 「하나의 정부와 경제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남한의 「혁명역량」 복구문제였다.
먼저 7월 30일 이그나치예프가 『남쪽과 북쪽에서 거대한 선거운동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고한 것처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구성을 위해 북쪽은 8월25일에,남쪽은 7월15일부터 8월까지 「인민대표」선출을 위한 선거에 착수했다.특히 남쪽 은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2중선거」를 실시하게 된다.각 市.
郡에서 5~7명의 대표들을 해주(海州)에 모이게 하여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그 회의에서 3백60명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비망록』에 의하면 남쪽의 선거진행 상황에 대해 박헌영과 허헌이 보고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박헌영은 선거가 양호하게 진행된다고 보고했다.선거가 끝난후 허헌은 우익과 중간파들도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성공작이었다고 자화자찬(自畵自讚)했 다.이것은과거 남로당계 출신들이 새로 구성될 북한정권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과장보고였다.
『비망록』은 최고인민회의와 정부 구성에 관련된 문제를 蘇군정측이 김일성.박헌영과 검토했음을 보여준다.특히 스티코프가 발라사노프에게 외무부의 각료구성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한 것에서 알수 있듯 소군정은 각 부(部)의 간부인선까지 개 입했다.
둘째,『비망록』은 당시 소련과 북한간의 경제협력문제가 중요한현안이었음을 보여준다.그중 2개년 경제계획 수립이 가장 중요한문제였다.특히 蘇군정은 북한정권 수립이후를 대비해▲기술원조협정▲조선인전문가 양성을 위한 소련전문가 파견▲소 련 대외무역부와의 계약 체결등이 이때 구체적으로 모색됐다.
셋째,蘇군정은 북한정권 수립을 추진하는 가운데서도 하나의 정부 건설을 위한 방안을 포기하지 않았다.이것은 소련측이 장기적으로 남한지역도 「혁명화」해 全한반도를 사회주의화한다는 전략을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이를 위해 스티코프는 남한에서 집회를 열고 활동을 조정하기 위한 특수기관 설치와 남한에서 합법적활동 가능성을 창출하는 문제에 대해 레베데프와 토의했다.
또 48년 7월30일 스티코프.김일성.박헌영회합에서 46년 박헌영이 월북후 제기한 남로당과 북로당의 연합중앙위원회 구성문제가 매듭지어졌음이 처음 드러났다.실제로 8월 중순 「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가 구성됐다.이것은 남로당과 북 로당이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남북노동당이 하나의 연합중앙위원회를 갖게 됐고,남북의 모든 문제를 이 연합중앙위원회에서 토의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쪽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남로당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스티코프와의 대화에서 남쪽문제는 주로 박헌영과 허헌이 보고하고 있다.특히 남쪽의 좌익세력지도를 위해 남로당은 서울에 김삼룡과 이주하를 책임자로 하는 「서울지도부」를 독자적으로 설치했다.이것이 스티코프가 언급한 「특수기관」의 실체였다.
『비망록』은 스티코프가 북한정권 창출의 임무를 마치고 소련으로 복귀하려고 했으나 소련 외무부의 만류로 계속 북한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뒷얘기를 전해준다.그만큼 그는 북한通으로서 북한정권 수립에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이것은 곧 북한 정권수립에 蘇군정의 지원이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연재를 마치며**************** 북한정권수립에 깊숙이 개입했던 蘇군정의 역할을 문서로 확인시켜준 귀중한 자료로 학계와 독자 여러분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스티코프비망록』연재를 이번호를 끝으로 마칩니다.그동안 연재에 보내주신 성원과 격려에 감사드립니다.비망록 추가발굴을 위해 계속 노력하여 성과가 있는대로 다시 연재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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