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나의 화려했던 돈세탁업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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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자네에게만 털어 놓는 이 이야기는 분명히 「나」의 이야기라는 점을 믿어주기 바라네.내가 돈 세탁업(洗濯業)에 종사하게 된 것은 그 분으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위탁받으면서부터 시작됐네.시인 한용운(韓龍雲)이 「님」이라고 부르는 그분 은 나에게 돈을 맡기면서 이 돈을 잘 굴리되 꼭 필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빌려 주라고 신신당부 하더군.그런데 내가 돈을 맡기가 무섭게 사업하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저마다 급하다고 아우성치는데 아주 혼났어.간신히 순서를 정 하고 돈을 꿔주기 시작하면서 대출절차를 마친 사람은 반드시 나를 보고 가라고 점원에게일러 놓았지.』 『내 방에 들어와 감지덕지 하는 업자들에게 나는 별로 긴 말을 하지 않았어.내가 도장을 꽝 누른 이 서류가귀하의 사업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아느냐고만 물었지.업자들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제각기 사례금(謝禮金)을 내놓더군.그런데 그들이 내놓은 사례금에는 쇳가루.시멘트 먼지.밀가루 얼룩같은 것이 묻어 있더라구.어떤 돈에는 술을 쏟았는지 맥주냄새도나고,어떤 돈에는 실오라기 같은 것도 붙어 있더라구.하여튼 모두 지저분했어.』 『그래서 나는 불가불 돈 세탁을 하기로 했어.돈은 깨끗할수록 좋은 거야.찢어지고 구겨진 돈을 밥풀로 붙이고 인두로 곱게 펴서 쓰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더군.어쩌다 돈에흙이라도 묻으면 손수건에 물을 조금 적셔 정성스럽게 닦아내던 생 각 안나나.요즘에는 돈을 너무 더럽게 써.』 『그런데 요즘의 돈 세탁은 은행을 통해야 한다는 것 자네도 알지.은행을 통한 돈 세탁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한달쯤 우리집 장롱속에 묵혀놓은 돈 보따리를 A은행에 맡기고 두달쯤 뒤에 그 돈을 찾아 B,C은행에 분산 입금을 시키지.다 시 한달쯤 뒤에 이 돈을 찾아 D,E,F은행에 쪼개서 입금시키는거야.그 다음에는 똑같은방법을 반복하면서 X,Y,Z은행에 이르는 거야.앞의 은행에서 빼서 뒤의 은행으로 세포(細胞)분열 시키는 이 방법은 은행을 많이 거치면 거칠수록 좋아.두번 빠는 세탁기나 팡팡 때려주는 세탁기로도 이 세탁 방법을 당할 수 없을 거야.드디어 최후 단계는 쪼갠 돈을 모두 나의 가명(假名)계좌에 집합시키는 것이지.이때 가명을 잘 골라야 해.「홍길동」이라고 하면 금방 들통이나.「김 용학」「김명경」처럼 평범한 이름이 좋아.나는 「나오미」라는 가명도 사용했는데 흑인 여자 모델로 나오미 캠벨처럼 자태가 아름다운 여자도 드물지.내가 생각해도 기막힌 가명이야.』『나는 나의 돈 세탁에 외국은행까지 이용하지는 않았어.미국 친구들은 국내에서 세탁한 돈을 외국으로 빼돌렸다가 다시 본국의 자기 이름 앞으로 투자한다더군.그것을 머니 론더링(Money Laundering)이라고 부른데.』 『내 돈 세탁 솜씨가 절묘하다는 소문이 나니까 한 친구가 두가지만 가르쳐 달라고 하더군.그 깨끗해진 돈을 누구와 함께 나눠 썼으며,93년8월 이후에도 돈 세탁을 했는가를 말해달라는거야.누구와 함께 썼는지는 절대 말할 수 없다고 했 더니 수긍하는 눈치더군.그리고 93년8월이 왜 그렇게 중요한 날이냐고 물었더니 그때부터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가 실시됐다는거야.그러면 실명제가 실시됐다고 더러워진 돈을 세탁하지 말고 그냥 사용하라는 말이냐,왜 그렇게 사람이 지저분하 냐고 쏘아 붙였더니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군.』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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