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첫 근대 조각가 김복진 작품 ‘햇빛’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1938년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서 김복진에게 제작 의뢰한 러들로 교수 흉상, 73×64㎝의 청동 부조다.

한국 최초의 근대 조각가 정관 김복진(1901∼1940·사진)의 작품이 발견됐다. 1938년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가 제작 의뢰한 미국인 교수 알프레드 어빙 러들로(Alfred Irving Ludlow, 1875∼1961)의 흉상 부조다. 일제 말 군수 물자 공출, 6·25 등으로 근대 조각품 대부분이 소실된 가운데 드물게 나온 작품이다.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으로 현재 남아 있는 윤효중의 ‘물동이 인 여인’(1940), 윤승욱의 ‘피리부는 소녀’(1941)보다 앞선 시기의 것이라 이 작품이 현존 최고(最古)의 근대 조각품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경원대 윤범모 교수가 최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발견한 러들로상은 가로 73㎝의 크기로 벽에 걸 수 있게 제작된 특이한 형태의 동판 부조다. 아치형의 윗면엔 이름이, 인물상 밑 중앙엔 “1912년 내한해 이 학교 교수이자 외과의사로 봉직하다 1928년 63세로 은퇴했다”는 문구가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가운데 원형 안에 러들로 교수의 옆얼굴을 새겼다. 아래 왼쪽엔 일어와 한자로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직원 및 동창일동 근정(謹呈)”이라고 적었고, 오른쪽엔 같은 내용을 한글과 한자로 적었다. 『알프레드 어빙 러들로의 생애』(연세대출판부, 2000)에 따르면 귀국하는 러들로를 위해 제자들과 교직원 일동이 흉판을 제작해 수술실에 걸어뒀다고 한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인 윤 교수는 “기록이나 양식으로 보아 김복진이 만든 기념조형물”이라며 “아치형 흉판 부조의 원 안에 인물상을 조각한 형식이 독특하며, 전체적 구조나 칼질 등이 격조 높은 수작”이라고 말했다.

흔히 한국 근대 조각의 시작은 김복진이 도쿄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1925년으로 본다. 그는 유학 중인 21년엔 문학평론가인 동생 팔봉 김기진과 함께 극단 토월회를 만들어 연극운동을 벌이기도, 귀국 후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국전, 윤효중 등 우리 조각사에 큰 획을 그은 제자를 양성한 근대 조각의 선구자다.

그러나 유족도 유작도 거의 없는데다가 좌익 활동 경력 등으로 그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상(1936)과 그 모형으로 추정되는 계룡산 소림원 석고 미륵불상, 그리고 예산 정혜사 관음좌상(1939) 등 불상 셋 뿐이다. 이번 발견으로 불상 외의 조각품이 한 점 추가됐다.

한동안 병원 외과동 내 벽에 걸려 있던 러들로상은 건물 신축 등으로 옮겨지면서 의료기기 창고에서 발견됐다. 상명대 이인범 교수는 “실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사진으로 연구할 수 밖에 없던 근대 조각사에 반가운 소식”이라며 “불상을 제외하면 근대 조각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권근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