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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狂人 류원덴과 향토작가 선충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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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 42면

서남연합대학 시절 학생들에게 강의 중인 류원덴. [김명호 제공]

서남연합대학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마르지 않는 샘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다. 원인 제공자는 교수들이었다. 개성 강한 사람들이 객지의 작은 도시에 뒤섞여 있다 보니 평소에 드러나지 않던 괴팍한 행동들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이 한두 가지 일
화를 남겼다. 그러나 류원덴(劉文典)을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서남연합대학<下>

1938년 11월, 서남연대는 소설가 선충원(沈從文)을 교수로 초빙했다. 전국을 진동시킨 대사건이었다. 중국의 학계와 문화계가 발칵 뒤집혔다. 전시(戰時)임을 까먹을 정도였다. 각 분야의 최고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학자들이 운집해 있는 서남연대였다. 대를 이은 서향세가(書香世家)에서 태어나 구미의 명문대학에 유학한 학자가 대부분이었고, 적어도 베이징대나 칭화대에서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치며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선충원은 요즘에야 장자제(張家界) 덕분에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후난(湖南)성 펑황(鳳凰) 출신이었다. 문성각(文星閣)과 문창각(文昌閣)이라는 남녀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이름만 거창했지 바위 위에 통나무를 엮어 대충 지은 무허가였다. 선충원은 그곳마저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학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연구 업적이 전무한 소설가였다. 학계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었다. 선이 하루아침에 서남연대 교수로 오자 반발하는 교수들이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접한 후부터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류원덴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1934년 칭다오 시절의 선충원 부부.

류는 고전의 대가였다. “중국 역사상 장자(莊子)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두 명 반뿐이다”라고 항상 말했다. 장자가 그중 한 사람이고 반은 류원덴 자신이었다.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다. 학문의 깊이만큼 문장도 세련되고 품위가 있었다. 그러나 성격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서남연대 교수로 오기 10년 전인 1928년 봄 안후이(安徽)대 총장에 취임하며 남들이 흉내 내기 힘든 행동을 했다. 취임식 날 “대학은 관공서가 아니다”라며 축하하러 온 안후이성 주석과 지역 위수사령관을 학교 밖으로 쫓아 버렸다. 하객들이 쉬쉬하는 바람에 그냥 넘어갔지만 평범한 사건은 아니었다.

같은 해 가을 교내에 좌익이 주동한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다. 때마침 안칭(安慶)에 시찰차 와 있던 장제스가 류원덴을 만났다. 서로 초면이었다. 류는 평소 세수를 하지 않고 이 닦는 것을 아주 귀찮아했다. 옷도 한번 입으면 누더기가 될 때까지 갈아 입는 법이 없었다. 평소 류의 책을 즐겨 보던 장제스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거리에 옮겨 놓으면 영락없는 걸인의 몰골이었다. “네가 정말 류원덴이냐”고 물었다. 류도 지지 않았다. “네가 정말 장제스냐.” 장제스는 “소요를 일으킨 학생들은 공산당원들”이라며 처벌을 요구했다. 류는 “대학에는 교수와 학생만이 있을 뿐이다. 누가 공산당원인지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총사령관이라면 부하들이나 잘 통솔해라. 내가 총장인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은 내가 책임지고 처리한다”고 답했다. 완전 훈계조였다. 대노한 장제스가 질책하자 류가 발끈했다. 장의 코를 손가락질하며 “어디서 군벌 따위가…”라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따귀를 때릴 자세를 취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의 경호원들이 황급하게 류를 끌고 나갔다. 장제스는 식식거리며 계단 위까지 달려와 끌려 내려가는 류의 등을 향해 “정말 미친놈(眞<760B>子)”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장제스와 쑹메이링(宋美齡)의 결혼식 주례를 섰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전 베이징대 총장이 소식을 듣고 장에게 달려가 사정한 덕택에 총장 직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겨우 수습됐다.

군인을 싫어했고 신(新)문학을 거들떠보지 않던 류원덴의 눈에 선충원이 사람으로 보일 리 없었다. 선은 졸병이었지만 군인 생활을 오래 했고 신문학을 연구한 사람도 아니었다. 류는 평소 다니지 않던 학교 부근 찻집을 부지런히 다니기 시작했다. 서남연대 부근에는 찻집이 많았다. 쿤밍(昆明)의 순박한 인심이 학생들에게 제공한 또 하나의 교실이었다. 도서관이 비좁았던 탓에 학생들은 인근 찻집에서 독서를 하곤 했다.

가격이 저렴했고 학생들이 오면 찻집 주인은 화로에 물주전자를 올려놓고 가버렸다.

온종일 앉아 있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이 온종일 들락날락하는 곳이었다. 류는 찻집을 돌아다니며 학생들 자리에 끼어 앉아 선충원의 험담을 해대기 시작했다. 용모나 옷차림이 학생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접근하기도 쉬웠다.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자 강의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선을 매도해 학생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대학자 천인커(陳寅恪)가 100원 가치가 있다면 나는 10원짜리다. 선충원은 1원짜리도 못 된다.” 한번은 수업 도중 공습경보가 울렸다. 학생들과 함께 천인커를 에워싸고 교실을 빠져나온 류원덴은 선충원이 옆 교실에서 황급히 달려나오자 “내가 폭격으로 죽으면 학생들에게 장자를 가르칠 사람이 없다. 너는 도대체 뛰는 이유가 뭐냐”고 호통을 쳤다.

류는 강의도 빼먹는 날이 많았다. 열 번에 세 번 정도 교실에 들어오는 게 고작이었다. 서양문학과 교수 우미(吳宓)는 항상 그의 강의를 청강하며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류는 우미가 질문할 때마다 무식함에 혀를 차며 화부터 내고 설명을 시작했다. 화를 많이 내는 날일수록 강의는 막힘이 없었다. 또 보름달을 좋아해서 달밤에 야외에서 수업하기를 즐겼다. 빙 둘러앉은 학생들 가운데 서서 달빛에 젖은 채 달에 관한 고인들의 시를 끊임없이 토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학생들은 진정한 풍류를 발견하곤 했다.

선충원은 평생을 ‘촌뜨기’라고 자처한 사람이었다. 예민하고 상처를 잘 받는 성격이었지만 스스로를 낮추며 자존심을 지켰다. 류원덴에 대한 불만도 토로하지 않았다. 그의 지독한 후난 방언을 알아듣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고 강의 내용도 시작과 끝이 불분명했다. 수강생도 별로 없었다. “종교를 대신할 것이 있다면 중국의 미(美)가 유일하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그래도 서남연대는 후일 루쉰(魯迅)과 비견되는 대작가로 중국인들이 영원히 기억할 것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선을 끝까지 보호했다. 1988년 10월 노벨문학상 수상자 소식이 전해지던 날 국내외의 중국인들은 5개월 전 베이징 충원먼(崇文門) 부근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난 선충원을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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