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우리는 당신을 할머니라 부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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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작년에 시집온 며느리가 딸을 낳았을 때 당신은 『딸이면 어떠냐.똑똑한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그러나돌아서서는 『망할것,아들을 낳으면 누가 뭐라나』하셨습니다.
손녀딸이 창문에 손가락을 찧자 당신은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뛰었습니다.뛰는 속도가 육상선수 같았다고 동네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집 아래층에 조그만 불이 났습니다.당신이 맨먼저 챙긴 것은 집문서도 금반지도 아니었습니다.손녀를 안고 2층으로 대피했습니다. 손녀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반장에도 뽑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당신은 여자도 뭔가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것을 확신했습니다.
아들 내외가 외국근무를 하게 되자 손녀는 당신에게 카세트 테이프를 주었습니다.온갖 재롱이 담긴 녹음 테이프를 들으며 당신은 이 애가 나의 못이룬 꿈을 대신 이룰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할머니라 부릅니다.
□ 작년에 시집간 딸이 태기(胎氣)가 있답니다.산기를 느껴 병원에 갔다는 사위의 전화가 왔습니다.당신의 가슴은 두근거립니다.옆의 동료가 『자네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네』하자당신은 『쓸데없는 소리』하며 화를 벌컥 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뜻밖에도 난산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당신은 그 누구에겐가 무릎을 꿇고 부르짖었습니다.『제가 잘못했습니다,제가 잘못 했습니다.』 어렵게 태어난 손자 녀석이 방긋방긋 웃으며 당신 품에 안깁니다.『햐! 요녀석 봐라.가만있자,요녀석을 학자를 만들까,사장을 만들까….』당신의 궁리는 뭉게구름처럼 일어납니다.우리는 당신을 할아버지라 부릅니다.
□ 엊그제 할아버지가 된 A장관은 잔잔한 감동을 느끼며 신문을 접었다.그는 부모의 사랑을 일깨워준 어느 기업의 신문광고를이제 막 읽은 참이었다.그는 그 광고의 주인공은 사실은 할머니,할아버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나이 또래의 부 모들은 대개 할머니,할아버지가 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자신이 이미 그렇게 돼있지 않은가.
잠시후 그는 앞에 놓인 1급 비밀 서류를 들춰 본다.A장관은국가의 장래 진로를 모색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그 서류는 「노령화 사회와 국가경쟁력 약화」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요지는 이렇다.서기 2000년이면 한국 인구의 15% 이 상을 55세 이상의 고령자와 노령자(65세 이상)가 차지한다.만약 이 비율을 선진국처럼 20%선까지 가도록 방치할 경우 국가 경쟁력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한국은 모든 수단을 다해 이런 사태를 막아야 한다.
같은 시간 A사장도 눈시울을 붉히며 신문을 접었다.그리고 숨을 몰아쉰 후 앞에 놓인 서류에 도장을 꽝 눌렀다.서류제목은 「인력채용 기본지침」.요지는 이렇다.
①여성은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는 것이 전통적 미덕이다.육아시설을 설치하면서까지 그들을 고용할 필요는 없다.
②같은 값이면 젊은이를 고용하라.그들은 창조력이 풍부하다.
③은퇴시기 연장은 검토할 수 없다.고령자의 증가는 회사의 활력을 잃게 할 뿐이다.
결재를 끝낸 사장의 표정에는 감동이 사라지고 근엄(謹嚴)만이맴돌았다.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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