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리뷰] 로댕갤러리 '안규철 - 49개의 방'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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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열고 도 열어도 다시 문이 나오고 똑같은 풍경은 계속된다, 우리 삶처럼. 자신의 작품인 '112개의 문이 있는 방' 속에들어간 작가 안규철씨.

가방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날개 모양을 한 흰 가방은 잠겨 있다. '그 남자의 가방'이다. 가방 주위를 한바퀴 돌아본다. 무엇이 들었을까. 조각가 안규철(49.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씨는 가방에 얽힌 추억 한 자락을 드로잉으로 펼쳐놓았다. "어느 이른 아침 집 앞에 웬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사라지고 그날 저녁 "내 날개가 들었다"던 사내의 가방이 집 앞에 놓여 있었는데 정말 날개가 들었을까 점점 궁금해진다는 짤막한 줄거리다.

5일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막을 올린 '안규철-49개의 방'전은 논리의 사다리를 버리고 허공 속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꾼 작가의 놀이터이자 얘기 마당이다. 미술을 통해 세상의 지배적인 힘들과 경쟁하려 했던 안씨는 "결핍과 상실을 모르고 겉만 번드르르하게 흘러가는 과잉과 과다의 세태를 뒤집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대미술의 흐름이나 형식이 아니라 미술 그 자체까지도 의심하는 본능과 직관의 외로운 힘이다.

아랫도리가 휑하게 잘려나간 '바닥 없는 방'은 우리가 누리려 애쓰는 자본주의의 안녕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까발린다.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원룸 한 채를 화장실까지 고스란히 재현했지만 천장에 매달려 흔들리는 그 집은 허리 위만 있는 뿌리뽑힌 허상이다. 작가는 다짐한다. "옳다고 말해지는 것들은 수상한 것이다. 세상에는 불투명한 것, 말할 수 없는 것, 내가 모르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믿어야 한다."

'112개의 문이 있는 방'은 제목 그대로 100개가 넘는 문이 잇대어 있는 거대한 미로다. 똑같은 손잡이가 달린 똑같은 나무문이 맞물려 문을 열고 들어가도 또 문이 나타나고 또 열고 들어가도 또 문이 나온다. 112개의 문이 만든 49개의 방은 끊임없는 윤회의 발자국 소리로 이어진다.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문 사이를 헤매는 동안 관람객은 잠시 길 잃은 자가 된다. 길 잃기를 두려워하는 현대인이라면, 더 좋기는 연인과 함께 온 이라면 은밀하면서도 노출된 이 49개의 방을 헤매면서 삶에 대한 생각 한 자락을 건져 올릴 수도 있다.

'상자 속으로 사라진 사람' '흔들리지 않는 방' 등 안씨 작품들에는 생각과 말이 고여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으로 말하는 이야기꾼이다. 모호한 선문답이 아닌 정교한 언어로 작업을 규정하고 싶다는 그는 때로 찾아오는 어려운 시기와 미술에 대한 회의를 어떻게 극복할까. '슬럼프 드로잉'에 유쾌하면서도 누구나 해봄직한 답이 들어 있다. 아침마다 빠지는 머리카락을 한 올씩 이어 만든 드로잉, 빵을 먹고 난 부스러기를 털어 만든 색면 드로잉, 나날이 쌓이는 먼지를 그대로 얹어 만든 자화상 등 작가의 상상력은 우리 모두를 신나게 만든다.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사라진 것은 다시 그리움이 되나니." 13일 오후 2시 전시장에서 작가와의 대화가 열린다. 4월 25일까지. 02-2259-778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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