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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갈이 공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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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본인들은 “그가 있어 부자를 함부로 미워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도시바 CEO와 9년간이나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을 지냈다. 그런데도 도쿄 외곽의 20평짜리 허름한 목조주택을 고집했다. 점심은 메밀국수로 때웠다. 저녁은 항상 집에서 밥과 된장국, 그리고 정어리 한 마리. 잠들기 전까지는 책을 놓지 않았다. 생활비(10만 엔)를 뺀 나머지는 모두 학교에 기부했다. 오일쇼크 때는 팔십 노구를 이끌고 스스로 사무실 계단을 올랐다. 도고 도시오(土光敏夫·1896~1988년)의 이야기다.

그는 기사 딸린 고급 승용차를 마다했다. 새벽 5시, 첫 버스와 지하철로 출근했다. 한번은 합병 의혹을 캐는 검찰이 그의 집을 기습했다. 부인이 말했다. “정류장에 서 있을 테니 나가보라”고. 검사는 허겁지겁 달려갔다. 정류장에서 몇 마디 묻고는 곧바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당시 검사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다.“그의 소박한 삶과 새벽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무죄를 확신했다.”

일본 정부는 골치 아픈 일마다 도고에게 떠안겼다. 가장 어렵다는 JR(일본철도) 민영화와 행정개혁도 마찬가지다. 행정개혁심의회장 시절, 추곡 수매가가 불거졌다. 총선을 앞둔 자민당은 수매가를 올리자고 야단이었다. 나카소네 총리도 “현실을 생각하라”며 압박했다. 도고는 “게시카랑(けしからん=괘씸하다)”이라고 했다. “나는 늙어 어차피 21세기를 살지 못한다. 그래도 이런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사표를 던졌다.

나카소네 총리가 직접 도고의 집을 찾았다. 좁은 다다미 방에서 정중하게 무릎 꿇고 사표를 반려했다. 이 장면은 TV로 생중계됐다. 그해 일본의 추곡 수매가는 처음 동결됐다. 농민 반발은 없었다. 나카소네 총리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바닥이던 지지도가 치솟고 그해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넘긴 것이다.

여야 간 공천 경쟁이 한창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이 단연 화제의 중심이다. 두 사람의 칼날에 여의도가 떨고 있다. 이미 물갈이 공천은 국민 여망의 흐름에 올라탔다. 괜히 계파 안배나 기득권 보장을 꺼냈다간 본전도 찾기 어렵게 돼 있다. 차라리 나카소네의 지혜를 배우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싶다. 개혁공천을 무릎 꿇고 받아들이는 게 정치기반 확대를 도모하는 길일 수 있다. 물론 공천심사위원들이 사심없는 한국판 도고가 된다는 전제 아래.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