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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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임희경은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 비명을 지르면서 득달같이 정민수에게 달려들었다.그러나 정민수는 이미 삶에 초연한 듯 묵묵부답.경건히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임희경은 친정 엄마에게 달려가 울고불고하면서 친정 부모,오빠,언니,친척들의 힘까지 모아정민수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으나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리고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다.그것은심지어 그이가 새로 사랑한다는 그 채영이라는 여자를 만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겠다고 해도 마찬 가지였다.임희경은 결국 흥신소를 동원해 「채영」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아보았다.그때 심정 같으면 정말 죽여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그녀는 비록 지금은 망했지만 전에는 재벌집의 막내딸이었으며 그녀에게 남겨진 유산도 많다고 하며 게다가 임희경 이상의 미인이었다.무엇보다도 키가 크고 늘씬했던 것이다.임희경은 갑자기 덜컥겁이 났다.전에는 그에게 자기만한 여자가 어디 있으랴 생각하고오만하게 고집을 부려 왔는데 그는 마음만 먹으면 자기 이상의 여자 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임희경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심각하게 전략을 고심하기에 이르렀다.그에게 고분고분하게 굴복해 평생을 그의 시중을 들며 살 것인가,아니면 지금의자리를 고수해 히스테리 왕국의 왕녀로 살 것인가…(그 녀는 정민수가 싸움을 할 때 하도 당신은 히스테리라고 해서 좋다,그러면 나는 히스테리 왕국의 여왕이라고 자처하며 드러누웠었다).그러나 임희경은 선뜻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이미 오랫동안 지배의 타성에 젖은 그녀로서는 그이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스스로굴복하고 자신을 하인으로 던진다는 것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마음에서는 「빨리 잘못했다고 그래,다시는 안그러겠다고 그래」하는 소리가 무수히 울려나왔지만 정작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뚱한 모습이었다.그러나 시간 이 갈 수록 임희경은 정민수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왜 빨리 행동을 하지 않느냐는 것에 점점의문을 가지게 되었다.그도 어쩌면 자기 같이 죽음을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그러면 이 때 기를 팍 꺾어놔 야 한다.그래서 어느 날 울고 불고 매달리며 왜 죽겠다고 마음 먹었으면 빨리 죽지 않느냐고 물었다.그러자 정민수는 신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자기「의식」은 모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무의식」에서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 무의 식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이다.자기의 판단이 옳으면 아마 무의식에서도 꿈등을 통해 긍정적인 메시지가 올 거라고 했다.그는 마치 무의식에 편지를 부쳐놓고 그 답장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임희경은 도대체 그런 「또라이」같은 소리가 어딨냐는 생각에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어제 당신의 애인에게 소포를 부쳤어요.그런데 당신이 그 소포가 도달하기 전에 죽지 않으면 그 애인은 당신에게 속았다고 생각할 거예요.그러니 죽으려면 빨리 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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