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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책읽기] 2000년을 이어 내려온 항우의 매력은 뭘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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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讀 『史記』之 項羽(사기 속의 항우 읽기)
왕리췬 지음,
충칭(2008년),
228쪽, 25위안

중국 역대 인물 중에 항우(項羽) 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산 영웅도 드물다. 전국시대 말기 항우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시간은 불과 7년 남짓이었다.

24세(BC 209년)에 진시황이 세운 진(秦)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3년 만에 18명의 제후를 거느린 서초패왕(西楚覇王)에 등극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역발산 기개세(力發山 氣蓋世: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뒤덮을 만하다)’란 명구를 남기고 31세에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들으며 자결했다.

무대 위에서 불과 7년간 활동하고도 2000여 년이 넘은 지금까지 꾸준히 인구에 회자되는 강한 생명력을 항우는 갖고 있다.

요즘 시각으로 봐도 스타 기질과 흥행 요소를 두루 갖췄다. 정상인과 달리 눈동자가 두 개였던 항우는 태어날 때부터 비범했다. 5척 단구가 평균이었던 시절에 키가 8척(1m80)을 넘었던 ‘근육질의 젊은 오빠’였다. 초나라 명문귀족 가문의 자재로 절세미인 우희(虞姬)와 염문을 뿌렸다. 진시황의 아방궁에 불을 질렀다는 방화 혐의는 최근의 고고학 연구 덕분에 벗었다.

오죽하면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자고이래로 첫 번째 인물”이라고 추켜세웠을까.

드라마적 요소가 풍부한 항우의 일생은 장이모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에 앞서 당·송·명대 시인묵객들의 단골 소재로도 등장했다.

중국에서 나온 신간 『사기 속의 항우 읽기』는 중국인들에게 항우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 매력을 발산하는 인물이란 사실을 새삼 확인해준다. 저자는 허난(河南)대학 중문과 왕리췬(王立群)교수. 중국중앙방송국(CCTV)의 인기 코너 ‘바이자장탄(百家講壇)’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했다. 픽션이 아니라 사기의 기록과 철저한 고증 및 분석에 기초한 디테일이 이 책의 미덕이다. 소설 『초한지』와 달리 항우를 중심에 놓고 당시의 정치 역학과 항우의 패인을 세밀화 그리듯 분석했다.

왕 교수는 이 책에서 다면적, 다층적인 항우의 얼굴을 하나씩 조명했다.

진을 멸망시키고도 항우는 천하의 대권을 손아귀에 틀어쥐지 못했다. 투박하지만 정이 가는 항우보다 매력이 떨어지는, 평민 출신으로 권모에 능한 유방(劉邦)에게 권력을 내주고 말았다.

다잡은 황위를 놓친 항우의 패인에 대한 왕 교수의 분석이 흥미롭다. 물론 1차적 책임은 항우 본인에게 돌렸다. 정치력이 떨어졌고, 수동적으로 군대를 이끌었고, 성격에 결함도 있었다.

항우가 대표한 권력집단, 즉 요즘으로 보면 선거 캠프의 패배 원인에도 주목했다. 왕 교수는 항우의 유일한 책사였던 범증(范增)에게 가장 큰 책임을 돌렸다. 항우가 작은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항우 캠프에서 입지가 높았지만 그의 계략은 여러 수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결국 항우에게 두고두고 정치적 부메랑을 초래했다.

항우 진영을 떠나 유방을 선택한 한신(韓信)의 인물 됨됨이도 도마에 올렸다. 정의보다 개인 감정에 따라 처신한 한신은 유방 진영에서 공을 세웠지만 결국 모반죄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 항우가 가장 신임했던 측근 주은(周殷)이 마지막 순간에 배신한 것도 항우를 사면초가에 빠뜨린 결정타였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 지도자의 성공과 실패는 측근이든 우수한 인재든 탁월한 정치력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리더십에 달려 있나 보다. 왕 교수가 다시 읽어준 항우 이야기는 정권 교체기와 총선을 앞둔 한국 독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 같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왕리취(王立群)

중국 허난(河南)대학 문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중국 고전문헌학 연구의 귄위자로 통한다. 중국사기(史記)연구회 고문으로 활동할 만큼 사기 연구에 밝다. 2006년엔 제2회 허난성 우수교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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