菊隱 李漢應열사 "抗日 순국행렬의 시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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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국은(菊隱)이한응(李漢應)열사-.
그는 1900년대초 대한제국의 對대영제국외교를 맡고 있던 주영(駐英)서리공사로 망국외교관의 굴욕을 무릅쓰며 기울어져 가는조국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이국(異國)하늘 아래서 31세로 순국(殉國)했다.
윤병석(尹炳奭)인하대교수는 지난 12일 李열사의 순국추모90주기 기념강연을 통해 『꺼져가는 국운을 살리려 하나밖에 없는 젊은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며 李열사의 뜻을 기렸다.
1874년 경기도용인에서 태어난 李열사는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관립영어학교를 마치고 20세에 성균관 진사,26세에 모교교관을 지낼 때까지 평범한 관리에 그쳤다.그러나 1901년 駐영국.이탈리아공사관 3등참사관으로 런던에 부임한 후 1904년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를 맡으면서 조국을 위한 충정과 함께 외교관으로서의 진면목이 발휘됐다.
당시는 러.일전쟁 직전으로 국운이 날로 기울어가던 때.그는 공사 취임 직후 10페이지짜리 서한을 英외무부에 보내 러.일전쟁을 경고하면서 대한제국의 독립보장을 위한 영국의 국제적 의무를 지적했다.또 첨부한 논문에선 한반도를 둘러싼 英.佛.러.日4각체제를 도형까지 넣어 설명하며 4者조약에 의한 세계평화보장을 역설하기도 했다.
후일 李열사의 순국을 영국정부에 보고한 마겡턴 명예총영사가 『李公은 학문에 근면한 모범적 인물이었고 영국 주재중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잘 보전했다』고 평한데서 李열사의 외교적 노력에대한 국제적 시각을 엿볼 수 있다.
1905년 이른바 韓日신협약으로 외교권이 실질적으로 박탈되는등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화하자 『나라에 주권이 없고 백성이 평등을 잃었으니 그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한즉 진실로 피 끓는 자 견딜 길이 없구나.종사가 무너질 판이요,겨 레가 이내 남의 종이 되리니 구차히 산다 한들 욕됨만이 더할 따름,차라리죽는 편이 나으리라』란 유서를 남기고 이국땅에서 분사했다.
그의 의거는 고위관리였던 민영환(閔泳煥),황제특명을 받은 이준(李儁)열사처럼 주목받지는 못했다.그러나 한민족의 의기를 알리는 항일순국 행렬의 시초가 됐다는 점에서 지난 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고 광복 50주년이자 李열사 순국 90주기를 맞은 지난 12일 李열사의 의거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마련됐다.
〈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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