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불법 대선자금과 '플리 바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불법 대선자금 중간수사 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7일 '삼성이 노무현 후보 측에 10억~20억원을 준 게 나왔다'는 방송 보도가 있자 "정말 아니다. 자꾸 이렇게 나가면 우리가 발표하는 내용에 그게 포함되지 않을 경우 축소수사라고 하지 않겠느냐"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로부터 24시간도 안 돼 검찰이 발표한 내용에는 삼성이 盧캠프에 준 돈 30억원이 포함됐다.

盧캠프 쪽의 삼성 돈은 검찰로서는 연막을 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지난 5개월여 동안 하느라고 했고 상당한 성과가 있었음에도 4대 기업의 대선헌금 '722억 대 0' 때문에 형평성 문제로 곤욕을 겪다가 출구를 찾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위야 어떻든 검찰로서는 최소한의 모양새를 갖추며 가까스로 연착륙에 성공한 셈이다. 다른 기업들은 양쪽에 모두 대선자금을 줬는데 한나라당에 거액을 준 대기업들만 盧캠프에 준 게 없다면 누가 납득하겠는가.

야당 측에서는 편파수사라며 반발하고 나섰지만, 이번 수사의 의미는 작지 않다. 고질적인 검은 선거자금에 본격적으로 칼을 들이대고, 취임 초기의 현직 대통령과 거대 야당이라는 살아있는 권력의 문제를 수사한 것은 검찰권 행사의 혁명적 진전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와 맞물려 대통령의 집사와 참모들을 줄줄이 구속하고 여야 거물들을 사법처리하는 등 성과도 컸다.

그러나 수사 결과에 대해 지적과 불만이 나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검찰 수사는 애초부터 취약 요소를 안고 있었다.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플리 바겐(plea bargain)이 그것이다. 검찰은 기업 측의 비협조로 수사가 벽에 부닥치고 형평성 시비가 제기될 때마다 협조 정도를 사법처리 잣대로 삼겠다며 어르거나 압박하곤 했다.

플리 바겐은 우리 법에는 없는 것이지만 이번 수사의 성격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정통 수사기법으로 접근하기에는 대상이 방대하고, 기업들의 불법 선거자금 제공이 공공연한 비밀인 한국적 상황을 감안할 때 그렇다. 전례도 있었다.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 수사가 그랬다. 기업들은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들에게 준 돈을 밝혔고, 그들은 구속됐다. 검찰은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업 입장은 과거와는 달랐을 것이다. 실토해야 할 돈거래 대상에 현직 대통령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특히 산 권력에 약해 검찰의 수사의지와 관계없이 결과가 왜곡될 수 있다. 여기에 대통령의 부적절한 한 마디가 그러한 우려를 더 크게 했다. '10분의 1' 발언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불법자금 규모를 파악하고 있는 기업들이 눈치를 보며 그들 나름의 계산을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오늘 발표가 실체적 진실은 아니다"라는 대검 수사기획관의 말이 크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객관성과 형평성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검찰 수사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수사의 목적이 노무현 캠프 쪽보다 한나라당이 더 부패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았지만 그동안의 수사로 이제 리무진이냐 티코냐의 차이는 무의미해졌다. 중요한 것은 양쪽 다 적극적으로 기업에 손을 벌렸고, 그 역할을 담당한 핵심인물들이 있었으며, 끌어 모은 돈을 비슷한 용도로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이제 정치권도 '10분의 1' 같은 껍데기 논란은 그만두고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한다. 본질적 문제가 전혀 다르지 않은데 "네가 많다"는 주장이 무슨 무기가 되겠는가. 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진정한 마무리는 정치권의 몫일 수밖에 없다.

이덕녕 사회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