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박정희의 틀, 毛澤東의 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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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철을 탈 때마다 물밀듯이 밀려 오는 인파를 보면 중국이 떠오른다. 13억의 인구도 저렇게 살려고 몰려 나올 텐데 우리가 과연 그들보다 무엇이 나은가? 땅덩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인구만도 우리의 20배가 훨씬 넘는데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점이 없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인가. 최소한 그들보다 몇배 이상 낫지 않다면 우리는 그들의 인해(人海)에 묻혀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과거 청산 한다고 허물기 경쟁

미국에서 몇년 살았던 경험으로 보면 미국인들이 우리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보다 3배 이상 소득이 높으니 당연히 3배 이상 일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우리보다 잘 살까. 반면 후진국의 근로자들은 우리보다 더 고생을 하는데 왜 못 사는 것일까. 우리 역사만 보더라도 "동창이 밝았느냐.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며 근면을 제일 큰 덕으로 가르쳤는데 왜 조선은 망하고 말았는가.

나는 이것을 '나라 틀'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틀이 좋은 나라에서 살면 그 틀 덕분에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히 잘 살게 되고, 틀이 나쁜 나라에서 살면 나쁜 틀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고생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틀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좋은 틀 안에서는 평범하게 하루하루 충실히 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일류가 되나, 나쁜 틀 안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3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틀'은 산맥이다. 산들이 히말라야 산맥에 속해 있으면 에베레스트산도 되고 마나슬루봉도 된다. 백두대간에 있으면 금강산도 되고 설악산도 되는 것이다. 산맥 안에서는 고만고만한 것 같지만 세계 제일의, 한국 제일의 산이 되는 것이다. 평지의 산은 아무리 높아도 동네 남산에 불과한 것이다. 산맥은 거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축적이 있어야 한다. 대를 이어 쌓아가야 한다.

우리나라도 좋은 틀을 가진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산맥을 만들어 주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지금 우리는 틀을 만들기보다는 틀을 부수기에, 산맥을 쌓기보다는 그나마 조금 높여놓은 산맥까지도 허무느라 정신이 없다. 과거청산이라는 말을 들은 지 벌써 십수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제는 60년 전의 친일을 청산하자고 나서고 있다. 친일을 용납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과거 허물기가 우리의 미래와 무슨 연관을 가지고 있느냐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과거청산이 좋은 틀을 짜는 데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를 의식하며 해야 한다.

좋은 틀을 위해 불거져 나온 못과 비뚤어진 창살은 바로잡아야 한다. 과거청산은 그러한 보수작업이 되어야 한다. 해방 전 사회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다 해서 사회주의가 우리 틀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해방 후 어렵고 복잡한 중에도 다행히 좋은 틀을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했으면 우리는 지금 공산화되어 북한 처지가 됐을 것이다. 중국이 왜 가난했는가. 마오쩌둥(毛澤東) 집권 동안 틀을 잘못 짰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가 죽은 뒤에야 새 틀을 짜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좋은 틀을 짜려고 노력했다. 그 틀 덕분에, 그때 쌓아놓은 산맥 덕분에 우리가 이 정도 살고 있다.

*** 어떤 새 틀 짤지 지켜보아야

언제부턴가 개혁이 유행어가 됐다. 입으로는 미래를 말한다. 그러나 그 개혁과 미래의 내용을 보면 모두 과거를 말하고 있다. "너는 과거에 어디에 있어서 안 되고, 너는 과거 무슨 일 때문에 안 되고…." 왜 미래를, 개혁을 말한다고 하면서 과거만 들추는 것일까. 왜 앞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뒤만 바라보는 것일까.

좋은 틀을 가진 회사는 내부경쟁이 자연스럽게 회사의 대외 경쟁력이 되듯이, 좋은 나라 틀을 가지면 국민의 일상이 모여 자연스럽게 국가의 경쟁력이 되고, 미래가 되는 것이다. 나쁜 교육 틀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쓰레기 지식만 쌓듯이, 나쁜 나라 틀 안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과 억압만 쌓여가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주어진 틀 안에서 열심히 일하고, 영화보고, 축구 구경하고, 가족을 사랑하고…일상을 사는 것이다. 틀을 만드는 것은 그 사회 지도자들의 몫이다. 허무는 것이 시원하다고 박수칠 일이 아니다. 그 다음 무슨 틀을 만드는가를 정신차려 지켜보아야 한다.

문창극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