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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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강태구는 한숨을 쉬며 그동안 리스트에 올랐던 연쇄살인범 용의자들을 떠올려 보았다.지금까지 수십번도 더 해본 짓이다.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지금 용의자들이란 단순한 공상의 차원에 불과했다.그러나 그나마 그 짓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범인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놈은 역시 김민우였다.그 아름다운 주미리의젖가슴에「민우거」라는 글자를 새긴 변태놈!이상하게 이 놈에게 쏠리는 예감은 떨어버릴 수가 없다.그러나 그놈을 체포하기엔 마땅한 증거가 없다.오히려 매스컴의 흥미만 자극해 시끄럽기나 할뿐이다.그리고 그동안 쭉 그놈을 관찰했지만 여자만 더럽게 밝히는 게 정신과 의사 자격에는 문제가 있을 지 몰라도 살인사건 용의자로는 어울리지 않았다.살인을 저지르는 놈들은 그래도 순진한 데가 있어 똥개같이 이 여자 저 여자 밝히지는 않는다.
두번째 용의자는 서채영이다.어느날 강태구는 아는 영화계 인사로부터 시나리오를 한 부 받았다.최근에 제작을 추진중인 시나리오인데 강태구가 흥미를 느낄 것 같아 보낸다는 것이다.강태구는대충 제목과 개요를 훑어 보니 또 그 정신과 의 사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시시껄렁한 시나리오라 구석에 던져 버렸다.『먹이사슬』좋아하시네….정신과 의사 연쇄살인사건을 추리로 다룬 책은 한동안 유행처럼 쏟아져 나왔다.『살인기획』『영혼의 육체』『지하실의 악마』『푸른하늘 은하수』등등….그 러나 하나같이 시시껄렁한게 범죄의 ㄱ,ㄴ,ㄷ도 모르는 것들이 얄팍하게 긁적거린 것들이었다.평소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강태구는 처음에는 그들의 내용에궁금했었으나 한 두권 읽다가 집어던지고 말았다.요즘 추리물들은하나같이 다 왜 이래 .아,좀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박진감있게 못쓰나.걸핏하면 섹스 얘기나 질펀하기는….아 무협소설같이 흥미진진하게 못쓰나.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저질 추리들은 비단 소설 뿐만이 아니었다.시나리오나 희곡도 이미 여러편이 나왔다.강태구가 사건을 맡고 있는 관계로 작가나 작가 지망생들이 원고를 한움큼 갖고 와서는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던 것이다.그러나 그 역시 신통한것도 없었다.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그런 식으로 흥미의 차원에서다루어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가 않았다.또 어디서 병신같은 것들이 모방 범죄랍시고 저지를 지도 모를 테니까….그래서 강태구는찾아오는 작가들마다에게 자제를 부탁하곤 했었다.그러나 강태구의말을 한 쪽 귀라도 듣는 작가는 없었다.다 자료 구하는 데만 눈이 뻘걸 뿐….아무튼 세상 많이 좋아졌다.문민 시대가 된 후로 요즘 영화계 놈들은 도대체 경찰 알기를 우습게 안다.얼마 전에는『투캅스』로 한참 경찰을 갖고 놀더니 이제는 사건 해결에지장이 있으니 좀 자제해 달라는 경찰 간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악착같이 시나리오로 갈겨댄다.옛날 같으면 알아서 설설 기던 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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