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교육과정 새로 짜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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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통 끝에 교육부와 과기부를 통합한 교육과학기술부가 출범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초·중등 학교와 대학 업무에서 해방돼 인재 양성과 기초 원천 분야의 연구개발 업무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교육과학기술부가 당장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가 있다. 지난해 2월 과학기술계의 적극적인 반대를 무시하고 밀어붙였던 ‘새 교육과정’을 완전히 새로 만드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하루도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

2009학년도부터 적용될 예정으로 현재 교과서 집필작업이 진행 중인 새 교육과정은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확인된 제7차 교육과정의 교육철학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학습량을 30%나 줄이고, 학생들이 원하는 과목의 수준별 교육을 통해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당초 목표는 완전한 허구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수직으로 추락해 버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실시했던 국제비교 연구에서 명백하게 확인된 사실이다. 심지어 적분 기호를 처음 본 공대 신입생도 있다고 한다.

새 교육과정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 억지로 줄였던 중3의 ‘과학’ 시간을 되돌리고, 중학교의 ‘역사’를 분리하고, 고등학교의 ‘체육’을 독립시켜 필수로 만든 것이 고작이다. 실패의 원인이었던 학습량 감축과 선택과 탐구 중심의 교육철학은 그대로 남아 있다. 오히려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학생들에게 외면당할 것을 두려워한 교사들이 가르치고 배우기 어려운 내용을 삭제해버려서 학습량은 더욱 줄어들었다. 과학 과목에서는 문제가 특히 절박한 수준이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학생들에게 주어진 과도한 명목상의 선택권이다. 22개 정도의 과목을 선택해야 하는 고2와 고3 학생들을 위해 준비한 과목이 무려 78개에 이른다. 자유로운 과목선택권이 보장된 대학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수준이다. 물론 전국의 어느 고등학교도 그렇게 많은 과목을 운영하지 못한다. 결국 학생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명목상의 선택권이지만 그 부작용은 심각하다. 어려운 과목을 회피하게 만드는 것도 문제지만, 과목을 너무 세분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이 불가능해져버렸다. 고2와 고3 학년의 국어는 ‘화법’ ‘독서’ ‘작문’ ‘문법’ ‘문학’ ‘매체언어’로 세분돼 있다. 그중 두세 과목을 선택해서는 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 국어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영어도 ‘실용 영어회화’를 비롯해 6과목으로 세분돼 있고, 사회는 무려 10과목으로 난도질됐다. 수학의 경우에는 ‘미적분과 통계 기본’과 ‘적분과 통계’라는 해괴한 과목까지 등장했다.

새 교육과정을 확정하는 과정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정작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담당했던 ‘교육과정심의회’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수백 명의 전문가가 들러리를 섰을 뿐이고, 실제 개정작업은 극소수의 교육부 실무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공청회도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전문가 집단의 진지한 의견은 모두 ‘과목 이기주의’로 매도되었다.

새 교육과정은 근본적인 골격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학교가 모든 과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생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과목과 학생들이 배우면 좋은 과목을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선택과목의 수를 대폭 줄여 현실화하고, 수학과 과학을 포함한 핵심 교과 위주의 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사범대의 교과 이기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난 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번에 바로잡지 못하면 다시 기회는 없을 것이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