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 어머니의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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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과 풍류를 아는 신여성이었던 필자의 어머니.

군용트럭을 타고 부대에 도착하면 간혹 미군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거지 중의 상거지 꼴을 하고 도착한 쇼 단원들을 한 명씩 손을 잡거나 허리를 감싸 안아 트럭에서 내려주었다. 공연단에 대한 일종의 예우였다.

공연 의상으로 갈아입고 분장을 한 선배들이 조금 전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하나 둘 무대 위로 올라갔다. 견습단원들은 말 그대로 무대 뒤에서 선배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며 분위기를 익혔다. 화려한 조명으로 눈부신 무대,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사이에서 우레처럼 터져 나오는 박수와 환호성. 공연장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나도 빨리 저 무대에 서야지! 저렇게 환호 받는 가수가 돼야지!” 무대 뒤에서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공연이 끝나고 다시 군용트럭을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 자정이 지났을 때가 일쑤였다. 도로 사정이 나빠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차량 사정도 좋지 않아 길 한가운데에서 고장 나는 경우가 잦았다.

내가 저녁상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아버지나 큰오빠가 찾을까 봐 어머니는 매번 핑계를 만들어 이리저리 둘러대셨다고 한다. 일찍 잠들었다고 하거나 결혼한 큰언니한테 놀러 갔다고 얼버무려서 그 자리를 피하고 나면 그날 하루는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워낙 대가족이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동네 어귀까지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혹시나 대문으로 들어서는 다른 가족과 맞닥뜨려 들킬까 봐 갈아입을 옷가지까지 들고 자정이 넘도록 길에서 서성거리셨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베니 김 쇼의 견습단원이라는 사실을 기억한 어머니는 둘째 오빠를 앞장 세워 화양연예주식회사를 찾아오셨다고 한다. 베니 김 선생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믿고 제 딸아이를 맡깁니다. 노래가 그렇게 좋다니, 죽어도 가수가 되어야겠다니 어쩌겠습니까? 저는 제 딸아이를 믿습니다. 허튼 짓은 절대 안 할 것이고, 한번 한다고 하면 하는 아이니까요. 그리고 이제 저는 선생님을 믿습니다.”

비단 우리 집안이 아니라 해도 당시 여자가 쇼 단에 들어가는 것을 환영할 집은 없었을 것이다. 또 쇼 단에 들어가는 딸을 부탁하러 찾아오는 부모 역시 있을 리가 만무했을 터다. 표면적으로는 부탁하기 위해 인사차 오신 것이었지만 “내 딸을 믿고, 당신을 믿는다”는 말은 엄포 중의 엄포가 아닐 수 없었다.

베니 김 선생도 무척 당황해 그저 그러겠노라 고개만 끄덕이셨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화양연예주식회사에서 아주 유명한 견습단원이 됐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때 이미 내가 가수가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신여성이었지만 선뜻 허락할 일은 아니었음에도 어머니는 그렇게 처음부터 안팎으로 든든한 방패막이가 돼주셨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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