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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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리영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예감이 좋지않았다. 『아니요.』 대답을 간신히 토했다.
『로맨스라 할까,비극이라 할까…아리영씨 아버지는 보기보다 젊고 열정적인 분이신가봐.』 무슨 얘기를 하려는가.길례는 불안한눈으로 서여사를 지켜봤다.
『아리영씨 학교 선배와 서로 좋아하셨었는데 그 분이 농장 다녀오다 산길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갔다는군요.손수 운전했었대요.』순간 귀가 멍했다.
『언제 일이에요?』 『한 이태 되나봐요.식물 유전공학의 소장학자로 이름있는 독신여성이었대요.』 손발이 싸늘해왔다.이태 전이라면 길례와 만나기 전 일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후로 아리영씨 아버지는 농장을 떠나 서울 집에서만 사셨대요. 아버지 수발 때문에 아리영씨도 서울에 있게 된 거라더군요.부군을 팽개치고 왜 서울에 와 있느냐고 했더니 자초지종을 얘기해 줘서 알았지요.』 서여사는 왜 이같은 귀띔을 이 자리에서 길례에게 하는 것일까.
『서울에 온 김에 역사대학이나 마저 다니고 갔었더라면 좋았을것을….』 아쉬운 말투다.서여사는 이 「결론」을 말하기 위해 아리영 아버지 얘기를 꺼낸 것일까.아리영에겐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있다고 했다.
화살촉.돌도끼등 석기시대 유물부터 삼국시대의 토기,고려.조선조의 도자기.그림에 이르기까지 문화재급 유물도 있어 이들을 모아 언젠가는 향토자료관을 짓는 것이 꿈이라 했다.
석기시대와 삼국시대 유물은 애초 농장 지을 때 공사 중에 발굴된 것이라 한다.출토 현장에 자료관을 지어 전시해 두고 관광객에게 관람시킬 생각이라 들었다.
농장서 가꾼 신선한 채소 주스랑 목장서 만든 낙농제품을 즉석에서 들게 하고 사가게도 하는 한편 유물도 보게 한다는 아이디어였다. 아리영이 역사대학을 다니는 것도 향토자료관 준비를 위한 공부 때문이라고도 했다.
『호강해서 자란 여성에겐 뭔가를 해내겠다는 오기가 모자라는 것같애요.』 서여사가 혼자 말하듯이 했다.
모르는 소리다 싶었다.
설령 「해내겠다」는 오기는 있어도 현실적으로 방도가 없으면 도리 없는 것이 아닌가.중년을 넘어선 가정주부들의 처지가 대부분 그럴 것이라고도 하고 싶었다.
미술관 뜨락의 흰자작나무는 여리고 투명한 새잎새를 파랗게 하늘거리고 있다.
아리영 아버지는 이 하얀 숲속에서 환상처럼 나타나 길례 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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